유머

당혹사2 여운형 이야기

호크준 2021. 10. 13.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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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여운형 (呂運亨·1886~1947)은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 등의 용어에 끼워 맞출 수 없는 융통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이승만(李承晩·1875~1965)·김구(金九·1876~1949)와 같은 우파는 아니었다. “계급투쟁과 유물사관을 배격하고, 무조건적인 국유화보다는 국공유와 사유의 혼합 소유 형태를 이상으로 생각했던 반(反)볼셰비키 사회주의자였다”는 평가(남시욱)가 나온다.

여운형의 정치노선을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탓에 늘 극우·극좌 세력들로부터 각종 테러와 암살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여운형은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의 험난한 길을 걸었던 좌파 독립운동가”(이규태 동국대 연구교수)였다.

여운형은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위로 3남매가 있었지만 일찍 사망해 집안의 경사였다. ‘태양을 치마폭에 품은’ 태몽으로 몽양(夢陽), 즉 ‘태양을 꿈꾼다’는 아호를 조부가 지었다고 한다. 조부는 어린 그를 무릎에 앉혀놓고 지도를 펼쳐 중국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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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때인 1900년 서울로 올라와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培材學堂)에 다녔다. 배재학당 내에 서재필이 조직한 협성회(協成會)의 토론회에 자주 참가해 열강의 먹잇감이 된 조선 사회의 현실을 마주하게 됐고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웅변력도 갖추게 됐다. 훗날 얻게 된 ‘조선 최대의 웅변가’라는 별칭은 이런 토론 과정을 거치며 습득한 것이리라.

몽양은 민영환(閔泳煥·1861~1905)이 세운 흥화(興化)학교, 통신원(通信院·지금의 체신청) 부설 우무(郵務)학당에 다녔다. 흥화학교 재학 당시 학교 교장이던 민영환이 자결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여운형은 훗날 《신천지》 1946년 8월호에 “민영환 선생이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순절하자 통곡하며 복수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1906년 3월 오십을 갓 넘은 아버지가 타계하자 동생 여운홍(呂運弘·1891~ 1973, 2대·5대 국회의원 역임)과 함께 3년 상(喪)을 치렀는데 상중에 집을 개방해 지리·역사·산수 등의 신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일종의 사숙(私塾)인 사립 광동(光東)학교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몽양은 고향(경기도 양평)에 지회를 설치해 활동했다. 이때부터 몽양은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조선과 중국은 입술과 이빨의 脣齒관계”

2007년 7월 19일 몽양 여운형 선생 60주기 추모식이 열린 서울 우이동 묘소에서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몽양은 1910년 강릉에서 초당의숙(草堂義塾)을 설립해 청년 교육에 전념했다. 잡지 《신천지》 1946년 8월호에서 “나의 생각은 사립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때가 되면 의병을 일으킬 생각이었다. 그래서 강릉으로 가서 ‘초당의숙’이라는 조그마한 학교를 만들어 모든 고난과 싸우며 경영했다”고 회고했다.

초당의숙에서 을지문덕과 이순신·안중근을 가르친 지 불과 반년 만에 경술국치의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불온사상’을 가르치던 초당의숙은 메이지(明治)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폐교되고 말았다. 여운형은 강릉을 떠나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여운형은 난징(南京)에 있는 금릉대학(金陵大學·지금의 난징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했다. 그는 쑨원(孫文)·쑹자오런(宋敎仁)·천두슈(陳獨秀) 등과 만나 동아시아의 반일전선(反日戰線) 결성 문제를 논의했는데, 몽양은 “조선과 중국은 입술과 이빨의 순치(脣齒)관계이다. 중국 혁명이 성공하면 조선 독립의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레닌과 만나기도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金奎植·1881~1950)을 파견하는 등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그해 11월 도쿄에 3주간 머물며 일본의 고위 인사와 지식인들을 두루 만나 조선 독립을 호소했다. 그는 11월 27일 제국호텔에서 수백명의 내외신 기자가 모인 가운데 이런 연설을 했다. 당시 연설은 매우 힘이 넘쳤다고 한다.

“어느 집에서 새벽에 닭이 울면 이웃집 닭도 따라 울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닭은 다른 닭이 운다고 우는 것이 아니고 때가 와서 우는 것이다. 때가 와서 생존권이 양심적으로 발작된 것이 조선의 독립운동이요, 결코 민족자결주의에 도취한 것이 아니다.”

여운형은 1921년 1월 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해 레닌 등과 면담했다. 상하이로 되돌아온 뒤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의 연락업무를 담당하면서 국공(國共)합작의 보이지 않는 조정자의 한 사람으로 활약했다.

덕분에 몽양은 취추바이(瞿秋白)의 추천으로 중국공산당의 당원 대우를 받았고, 다른 한편으로 쑨원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몽양은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양쪽에서 당원 대우를 받은 유일무이한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몽양은 “중국이 국공합작을 통해 혁명에 성공한다면 곧바로 조선의 독립 내지 조선독립운동에 결정적인 전기가 마련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중앙일보》와 일장기 말소 사건, 그리고 건국동맹

경기도 양평군이 개관한 몽양 여운형 선생의 생가기념관 모습이다. 몽양은 1929년 7월 10일 상하이 야구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돼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여운형이 출감한 것은 1932년 7월이었다.

출옥 후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젊고 진취적인 신문인 《조선중앙일보》는 사회주의자·민족주의자를 가리지 않고 쟁쟁한 인물들을 영입했다.

주필에 이관구(李寬求), 편집국장 김동성(金東成), 영업국장 홍증식(洪增植), 편집국원에 이태준(李泰俊), 김복진(金復鎭), 윤석중(尹石重), 고경흠(高景欽), 김남천(金南天), 이승만(李承萬), 박팔양(朴八陽) 등 당대 일류들이 편집국에 집결했다고 전한다.

일반적으로 일장기 말소사건은 《동아일보》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조선중앙일보》가 먼저였다고 한다. 총독부 검열용 제1판에선 일장기가 들어갔지만, 2판부터는 일장기를 지우고 손기정 사진을 게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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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은 신문사 사장직에서 물러난 뒤 1940년 《신세기》 1월호에 이렇게 밝혔다.

“신문사를 나온 이래 하는 일 없이 그날그날을 덧없이 보내고 있다. 업(業)을 잃은 지 이미 3년. 몇몇 친구들의 우의적 원조로 말미암아 생활하고 있는 나의 마음은, 모래 위에 쌓은 탑 기둥같이 언제나 불안하다.”

1942년 12월 여운형은 또다시 경성헌병대에 연행, 구속되었다. 죄명은 치안유지법, 육해군 형법,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이었다. 그해 8월 말 지인들에게 미군기의 도쿄 공습 상황(1942년 4월 18일), 일본 비행기의 낙후성, 미국 내의 조선독립운동 상황 등을 설명했다는 혐의였다.

1942년 12월에서 1943년 7월까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몽양은 “어떻게 해서든지 나에게 부과된 독립투쟁을 계속해야 하며, 일제가 멸망 직전이니 민족해방투쟁 단체를 조직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 단체가 바로 ‘건국동맹’이란 비밀 단체였다. 1944년 8월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조동호(趙東祜)·현우현(玄又玄) 등 좌익계 독립운동가를 중심으로 조직된 건국동맹은 조선의 자주독립 회복을 목표로 비밀리 활동했다. 후방 교란을 위한 노농군(勞農軍) 편성을 목적으로 군사위원회를 조직했으며 만주군관학교에 파견된 박승환(朴承煥)을 통해 유격대를 편성, 국내로 진입할 계획까지 세웠다.

강만길의 《한국현대사》(1990년 9판)에 따르면, “건국동맹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국내에 조직된 유일한 건국 준비조직이며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의 독립운동 단체와도 연결됐고 좌우익 세력이 함께 참가한 건국 준비조직”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

1946년 2월 중순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될 때 밀담을 나누는 여운형(오른쪽)과 박헌영.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이 있기 4시간 전인 1945년 8월 15일 오전 8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는 여운형에게 치안유지에 관한 협력을 요청했고, 그는 ▲전국적으로 정치범과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치안유지와 건국운동을 위한 모든 정치운동에 대해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등 5가지의 조건을 붙여 조선총독부 요청을 받아들이고, 즉각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시켜 위원장이 되었다.

건준을 이끌어나간 여운형의 정치노선은 ‘중도좌파’ 혹은 ‘좌도 우도 아닌 민족주의적 중간노선’으로 평가된다. 건준은 송진우(宋鎭禹·1890~1945), 안재홍(安在鴻·1891~1965) 등 우익 인사들이 불참을 선언하면서 좌파 중심 조직으로 변해갔다. 박헌영(朴憲永·1900~1955) 중심의 조선공산당 재건파가 헤게모니를 잡으면서 건준의 좌익 인사들이 수립한 ‘조선인민공화국’ 역시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여운형은 1945년 11월 12일 건준 조직을 모체로 조선인민당을 창당하고 미군정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을 지지한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 문제로 좌우가 대립되었을 때 공산당과 함께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1946년 2월 15일), 찬탁 진영으로 돌아선다. 하지만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좌우의 협공으로 조선인민당 또한 해산의 운명을 맞는다.(1947년 2월 27일)


左右합작

여운형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자 1947년 5월 근로인민당을 결성, 좌우합작을 계속 추진했다. 그가 “투쟁적이고 배타적인 공산당과 분명하게 선을 그은 데는 젊은 시절 국내에서 5년간, 중국 상하이에서 3년간, 8년간 전도사로 시무한 경험과 신앙”(김정형)도 작용했다.

몽양은 극단적인 좌우 대립 구도 속에서 분열을 막기 위해 좌우를 포용하는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을 지향하는 건국 노선을 견지했으나 이미 미소 냉전이 현실화한 상황에서 그의 몸짓은 이상론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타고 있던 자동차가 서울 혜화동 로터리를 돌던 중 가로막는 트럭 때문에 잠시 정지해 있을 때 갑자기 차 밖에서 2발의 총탄이 발사돼 여운형은 즉사했다. 체포된 한지근(당시 19세)은 극우단체인 백의사 단장(염동진)에게 권총을 건네받았다고 자백했다. 여운형의 암살은 좌파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본지는 여운형의 당대 행적이 담긴 《삼천리(三千里)》(1930년 5월), 《동광(東光)》(1931년 5월), 《신세기(新世紀)》(1940년 1월), 《신천지(新天地)》(1946년 8월)에 실린 글과 《조선일보》 1947년 7월25일자 기사를 소개한다. 가급적 원문을 그대로 살리되 현대어 표기에 맞게 일부 고치고 띄어쓰기를 했다.

▲참조= 김정형의 《20세기 이야기: 1940년대》, 이규태 동국대 연구교수의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의 험난한 길을 걸은 여운형’, 강만길의 《한국현대사》(1990년 9판)


열차(列車) 중의 여운형
김을한(金乙漢)

《삼천리》 1930년 5월호에 실린 김을한의 ‘열차 중의 여운형’. “조선○○운동의 거두 여운형 피착(被捉)설….”

이것은 1929년 7월 3일에 발행된 ○신문 사회면 기사 중의 한 구절이다.

그날에 이 통신을 받은 우리들은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상해의 넓은 천지—더구나 ××관헌의 세력권 외에 있을 여(呂)가 쉽사리 당국에 체포될 리가 없으리라는 것도 한 이유였으나 그보다도 종래에 몇 번이나 피착설을 전하던 그가 정말 도무지 한 번도 잡혀본 적이 없었던 사실이 더욱이 우리로 하여금 그 보도를 의심케 하였다. 그래서 이 보도를 전해준 D통신사로 전화를 걸고 진부(眞否) 여하를 따져도 보았으나 역시 전문과 같이 “상해운동장에서 야구 구경을 하다가 일본 관헌에게 잡히었다”라는 간단한 사실 이외에는 그것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아직 잘 알 수 없다는 모호한 대답을 할 뿐이었다.

그러면 혹시 그의 영제(令第)에게나 무슨 소식이 왔나 하고 몇 번이나 미싱 회사로 전화를 걸고 여운홍(呂運弘)씨를 찾았으나 공교롭게 인천에 출장하시고 마침 아니 계시다고만 한다.

이래서 할 일 없이 그날 신문에는 전기(前記)와 같이 그저 피착설이 있으나 진가(眞假)는 아직 알 수 없다는 흐리멍덩한 자신 없는 기사를 보도함에 지나지 못하였었다.

비록 그와 같이 간단한 보도에 지나지는 못하였으나 그 기사는 과연 각 방면에 비상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저녁을 먹고 신문사에 가보니 편집국의 전화가 잠시도 쉬일 새 없이 요란히 울리는데 열에 아홉은 거의 대개가 여운형에 대한 사실 여부를 묻는 말이었다.

“과연 여운형이는 이름난 사람이로구나!”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새삼스럽게 되풀이하면서 “아직 정확한 것은 잘 알 수 없습니다” 소리를 하기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으려니까 두 눈이 뻘게진 여운홍씨가 와락 달려들며 “여보, 어떻게 된 일이요”라 하며 냅다 나에게 질문을 한다.

그래서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하고 D통신사의 전문만을 가지고는 잘 알 수가 없어서 아까부터 운홍씨를 찾았다는 말을 하였더니 그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다만 “큰일 났군. 큰일 났어!” 소리만을 자꾸 연발할 뿐이었다.

그날 저녁 신문에는 공교롭게 D신문도 G신문도 이 보도를 쓱 빼어먹어서 이상하게 C신문만이 홀로 이 기사로 이채를 발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안 일이지만 D신문이나 G신문은 공교롭게 D통신사의 전보를 보지 않은 까닭에 이날의 여운형에 대한 소식을 전혀 몰랐었다 한다. 이 까닭에 여운형 피착에 관한 보도는 오행으로 C신문만이 가장 신속하게 되었다.”

* * *

그런 일이 있은 지 만 3일 만에 각 통신사의 정확한 속보와 경무당국에 정식 입전(入電)으로 여운형의 피착설은 드디어 사실로 판명되고 말았다. 그 후 며칠 동안은 또 상해 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그가 일본 장기재판소로 올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조선으로 올 것인가? 조선으로 온다면 경성으로 올 것인가? (중략)

수원에 도착되기는 그날 오후 6시쯤이 조금 지난 어스레한 황혼이었는데 ‘플랫폼’에 난리여서 보니 저편 궤도(軌道)에는 벌써 여운형을 실은 북행 특급열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이 농롱한 검은 연기를 토(吐)하며 푸‐푸‐소리를 내고 있었다.

비조(飛鳥)와 같이 특급열차에 뛰어오른 우리들은 마치 먹을 것을 찾는 독수리 모양으로 온 차(車)를 뒤지기 시작하였다. 일등에서 2등으로—2등에서 3등으로—그러나 꼭 있어야 할 그의 모양은 도무지 보이지를 않는다.

이상(異常)! 하다라는 생각을 하며 무심히 3등 침대차 안을 들여다보니 흡사히 그림 속에 있는 사람과 같이 여운형의 얼굴이 유리창을 통하야 언뜻 눈에 들어온다.

옳지 되었구나!라는 생각으로 선뜻 문을 열고 들어서니 좁은 3등 침대 한구석에는 보기 좋게 난 ‘카이젤’ 수염에 이마가 시원하게 넓고 눈이 부리부리하고 얼굴빛이 조금 검고 기골이 장대한 양복신사 한 사람을 중심으로 그의 바른편에는 낯익은 경찰부의 경부(警部)가 앉아 있고 왼편에는 S형사가 앉아 있는데 가운데 앉아 있는 장대한 이가 여운형임은 한 번 보아서 능히 알 수가 있었다.

그들이 앉은 바로 그 뒤편 ‘벤치’ 부근에는 부산까지 영접 나간 여운홍씨의 전(全) 가족이 혹은 앉고 혹은 서 있는데 2여 년 만에 철부를 차고 고국에 돌아오는 친지를 만나는 일희일우에 누구나 다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어 있는 듯하였다.


다른 여객들이 여운형이야?
저이가? 하고…

우선 여운홍씨에게 먼저 인사를 한 우리는 호송경관 외 호의로, 절대로 다른 이야기는 않겠다는 약속으로 여운형과 첫인사를 교환하게 되어 각기 명함을 내어주며 “먼 여행에 얼마나 고단하냐”라고 물으니 그는 커다란 두 눈에 가벼운 미소를 띠우며 무언중에 사의를 표하야 “무어 아무렇지도 않다”라고 커다란 손을 내밀며 일일이 힘 굳센 악수를 하여 주었다.

그리고 그는 종시 침묵 일관으로 말없이 획획 지나가는 창외의 고국 산천을 내다보다가는 있다금씩 “큰아버지! 큰아버지!” 하고 따르는 아직 세상을 모르는 금년 일곱 살 된 나이 어린 조카 S 곁에서 머리를 무심히 쓰다듬어 주기도 하는데 언뜻 보아서는 도무지 희로애락 간의 이렇다는 표정을 찾아낼 수가 없었으나 그의 시원하고 커다란 두 눈 속에는 어디인지 감개무량한 회포가 떠도는 듯도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협○한 3등 침대는 15~16명이나 되는 벌떼 같은 신문기자들로 인하여 더 한층 좁게 된 데다가 보기 싫도록 실컷 보다가도 그 사람이 좀 색다른 사람이라면 다시 더 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상정이라 한종일을 한 차를 타고 오면서도 누가 누구인 줄을 잘 몰랐다가 신문기자들의 수선으로 비로소 여운형이 잡혀 오는 줄을 알게 된 다른 여객들이 여운형이야? 저이가? 하고 일제히 나도 나도 몰려나오는 바람에 3등 침대차 내는 말할 수 없이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대혼잡을 이루었었다.

나는 이 틈을 타서 그의 계씨(季氏)를 통하야 대략 다음과 같은 문답을 여운형과 교환할 수 있었다.

나 “당국의 말을 들으면 조선 XX당 사건에도 당신이 관계가 있다고 추측이 구구한데 사실은 어떠합니까.”

여 “최근 5년간은 전부 중국 혁명 완성에 노력하였고 따라서 손문(孫文)의 주아연공(駐俄聯共·주소련연합-편집자 주) 정책에 의하야 다소 XX당 사건에는 관계가 있었으나 조선 XX당 사건에는 관계가 없었소.”

나 “중국의 극좌파와 깊은 관계가 있는 까닭에 장개석(蔣介石) 일파의 국민당의 중요 간부가 당신을 싫어한다는 말이 있더군요.”

여 “내가 중국 국민당의 극좌파의 수령이라 한 왕조명(王兆銘)의 고문으로 있으니까 혹시 그런 말이 날지도 알 수 없으나 그렇다고 현 국민 정부의 간부급들이 그렇게 나를 싫어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소. 그 증거로는?…”

나 “무슨 증거가 있나요?”

여 “내가 지난번에 남양(南洋)을 시찰하고 돌아온 후 미국인이나 영국인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백인종들이 남양 일대의 약소민족을 ○○○(검열로 삭제된 것으로 추정-편집자)하고 하는 것을 본 결과 금년 가을쯤 남양에서 아○아(亞○亞)회와 같은 것을 개최해볼 생각이 있었는데 어찌 알았는지 이 소식을 듣고 장개석이가 사람을 보내어 그 계획을 공동으로 하자는 제의까지 있었으나 왕조명과의 관계로 즉답을 피하고 고려한 뒤 이와 같이 되었소.”

나 “비율빈(필리핀-편집자)에서는 여행권을 다 빼앗겼다지요?”

여 “비율빈에서는 약 1주일 체재(滯在) 중에 전후 4차의 연설을 한바, 그 내용이 미국 관헌의 기휘(忌諱·꺼리어 싫어함-편집자)에 저촉되었다 하야 여행권을 빼앗긴 일이 있소.”

나 “무슨 연설이었기에 미국 관헌의 감정을 샀나요.”

여 “…(중략)…”

나 “당신이 상해에서 피착된 데 대하야 중국 측에 항의를 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누가 하였을까요?”

여 “지금 초문(初聞)이올시다. 중국 측에서 하였다면 왕조명이가 하였겠지요.”

나 “상해에 있는 가족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여 “운홍(계씨)이가 가서 다녀오겠다 하나 나는 당분간 거기 두어볼까 하오. 산 사람이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소.”

나 “상해에서 피착되던 당시의 광경을 좀…(이때에 호송경관의 제지로 부자유한 문답이나마 더 계속지를 못하였음).”

* * *

경성역에서 내리면 마중 나온 군중이 많을까 봐 호송경관은 미리 용산역에서 내리기로 작정한 모양으로 열차가 용산역에 닿자마자 그들은 벌써 내릴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여운형은 묵묵(默默) 태산(泰山)과 같이 무거웁게 앉아 있던 장대한 몸을 일으키며 한 손에는 그의 부인이 상해 일본영사관으로 차입해주었다는 검정 트렁크를 선뜻 들고, 체포될 때 분실하였다 하야 머리에는 여전히 모자도 안 쓴 채 무거운 걸음을 ‘플랫폼’으로 옮겨놓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여기서야 비로소 ○○○○(판독불가-편집자)듯이 각 신문사 사진반의 ‘마그네슘’ 터뜨리는 소리가 일제히 요란케 나는데

“여운형은 상상하는 바와 같이 참 큰 사람이거든! 그저 옆에만 가 있었어도 일종의 위압을 느낀단 말이야!”

라고 옆에 나란히 서서 여의 뒤를 따라 나오던 B라는 일본문 신문 기자까지 이렇게 중얼거리며 …(말줄임표는 일제 검열로 삭제된 것으로 추정-편집자)함을 마지않는다.

“사스가니 에라이”(‘과연 훌륭하다’는 의미-편집자)라는 말은 그날에 그들이 받은 공통된 인상이었다.

정차장 구내를 벗어나서 밖에는 벌써 경찰부의 제2호 자동차와 T경부가 미리부터 여운형을 기다리고 있다가 여가 밖으로 나오기까지 즉시 자동차에 실어가지고 경성시내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 * *

이날 경성역에 마중 나왔던 여의 다수한 지기 친척들은 과연 감쪽같이 헛물을 켜고 말았다.

▲출처=p.36~39 《삼천리(三千里)》, 1930년 5월


철창리(鐵窓裡)의 거물들
김두백(金枓白)

《동광》 1931년 5월호에 김두백이 쓴 ‘철창리의 거물들’에 나오는 여운형에 관한 글이다. 최근 계속적으로 해외에서 잡혀 오는 사람들이 많다. 공산당원이란 모의로 간도지방에서 수없이 청년이 수갑을 차고 들어온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수 3년 전만 하야도 거의 안전지대로 알던 길림, 상해 등지에서까지 혹은 밀정의 계략에 빠져서, 혹은 국제적 착잡(錯雜·어수선하다-편집자)한 관계로 남의 손에 잡힌 몸이 되어 몽매에 의희(依稀·거의 비슷하던-편집자)하던 고토(故土)를 밟은 사람이 많다. 좁은 조선인들 그들을 용납할 만한 곳이야 없었으랴마는 소망과 주사(做事·일을 꾸려나감-편집자)가 남과 달라서 해외에서 표랑하야 망명객의 찬 꿈을 맺으면서도 행동의 자유를 얻음에 만족하던 그들이 일조(一朝) 누○(판독불가-편집자)에 걸리어 영어의 몸이 되니 그 소회 또한 남과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중략)


여운형

상해 대마로(大碼路) 야구장에서 재작년(1929년) 7월에 잡히어 경성 복심(覆審)법원에서 3년 징역을 받고, 목하 대전형무소에서 그물을 뜨고 있는 그는 “임연선어 불여퇴이결망(臨淵羨魚 不如退而結網·연못에 앉아 물고기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돌아가서 그물을 짜는 것이 낫다-편집자)”이란 맹자의 일구(一句)를 써서 그의 최근 심경을 그 계씨에게 알리었다 한다.

기독교도로 최초의 출세를 한 그는 최근에 와서 공산주의자로의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거니와 그가 기미(己未·1919년-편집자) 전년이던 무오년(戊午年) 8월 하순경에 상해에서 장덕수(張德秀)·조동호(趙東祜) 등과 같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야가지고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제출하고 대표를 파견한 것을 비롯하야 혹은 의정원 의원으로, 혹은 임시정부 외무부 위원장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세인(世人)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1919년, 일본 탁식국(拓殖局) 장관 고하(古賀)씨의 초청을 받아 동경정계에 나타났던 때니 그의 유창한 영어와 현하(懸河)의 웅변이 우선 일본 신문기자들을 탄복게 하고, 그의 개결(介潔·성품이 깨끗하고 굳음-편집자)한 행동과 견고한 의지가 정계 요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었으니 동대(東大) 교수 길야작조(吉野作造) 씨로 하여금 “일본서도 드물게 볼 인물이다”라고 격찬(激讚)을 아끼지 않게 했다는 풍평(風評)도 그때의 일이었다.

“돈은 필요하지마는 지조와 교환한 돈은 쓸 수가 없다”고, 제출된 30만원 조건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말도 있고, “청도(靑島) 총영사의 종신직보다는 종신토록 하여야 할 딴 직분이 있다”고 단연히 동경을 떠났다는 말도 있다. 기후(其後)에 여운형은 1923년 1월 중순경 노도(露都) 모기과(莫期科·모스크바-편집자)에서 개최된 원동(遠東)민족대회에 참석하야 기염을 토한 일도 있었고, 비율빈(比律賓·필리핀-편집자), 남양 등지에로 돌아다니며 세계의 현황과 약소민족의 장래에 대하야 열변을 토한 일도 있었다 한다. 그의 해외생활이 전후 15년에 긍(亘)하였으니, 그의 관계한 일이 어찌 이에 그치랴마는, 그가 잡혀오는 기차 중에서 기자단에게 말한 바와 같이 소성(所成)은 없었으나 해외의 여러 가지 운동에 그가 참가치 아니한 일이 거의 없었으니 촉진회, 노병(勞兵)회, 대표회 등등에도 그의 족적이 없는 곳이 없다. 당년 46세인 그는 지금 형무소에서 주는 콩밥 세 덩이로 장신위구(長身偉軀)의 건강을 지탱하고 있으니 반도 산하에 양춘(陽春·음력 정월, 따뜻한 봄-편집자)의 엄이 틈을 철창 속에서 내다보는 그의 감회는 그가 아니고는 모를 일이다.

▲출처=p.46, 《동광(東光)》, 1931년 5월


나의 전진목표
‐비약(飛躍) 전야의 침묵
呂運亨

《신세기》 1940년 1월호에 실린 여운형의 글 ‘나의 전진목표-비약(飛躍) 전야의 침묵’이다. 《조선중앙일보》사를 나온 이래 나는 하는 일 없이 그날그날을 덧없이 보내고 있다.

업(業)을 잃은 지 이미 3년. 몇몇 친구들의 우의적 원조로 말미암아 생활하고 있는 나의 마음은, 모래 위에 쌓은 탑 기둥같이 언제나 불안하다.

자기 심신을 건전하고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직업성의 정열적 행복감을, 아침저녁으로 절실히 느끼는 요즘의 나 자신을 문뜩 발견하고, 남모르게 놀라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의 친구들은 이러한 나의 심리적 변화를 알아줌인지, 혹은 금광에 손을 대라고 하고, 또는 금광회사의 조직체 속에 나의 이름을 넣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뜻은 금광이라는 실업적 색채를 띤 세계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 그러한 무아경에 자아를 집어넣어, 흥분적 시각을 소모시키기에는 내 정신은 너무나 소극적이고, 사색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심리상태는 비단 여기에서만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무릇 상업, 교육—이러한 것에서는 먼 거리에 서 있는 나다. 내가 교육 방면으로 전신(轉身)하거나 상업 방면으로 옮긴다 해서, 세상에서 나를 나무라거나 물리칠 이는 없을 것이다. 또 그러한 나를 사회에서 반기거나 기대할 이도 없을 것이다. 얼른 말하자면 그러한 일을 하지 못할 나를, 누구보다도 나 자신 역력히 인식한다.

그렇다고 내 앞에 마땅한 직업이 나타날 이도 없을 것이요, 또 그러한 기회는 없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난다. — 주관적 사업의욕에서 출발하는 나의 생활기도는, 객관적 제(諸) 정세(情勢)의 불리한 조건 아래 낱낱이 거부되고 만다. — 위에 쓴 것 같은 말을 어떤 청년에게 하였더니 “그러나 선생의 정신력만 굳세다면 능히 그러한 객관적 불리한 요소를 물리치고 자진해서 무슨 사업이든지 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할 때의 이 청년의 눈에는 열(熱)이 있었다. 불타는 듯한 인간적 극복심이 있었다. 가장 굳세게 인생을 탐구하는 가장 대담하게 세상을 호흡하려는 기백이 있었다.

나는 이 반문을 듣고 미소를 금하지 못했다. 왜 그런고 하면, 이 청년의 물음 그 자체가 내가 항상 품고 있는 생각이기 때문이며, 또한 언제나 내 두뇌를 떠나지 않고 깊이깊이 함축되어 있는 나의 평상시의 준비적 문구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 객관적 제 정세를 대담하게 물리치고 팔을 걷고 나선다면 이루어지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떠한 사업이나 계획에 대한 실천 이전의 심적 준비를 말하는 것이다. 그 의도하는 사업을 성취시키려면 계획과 심적 준비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사회적 후원(유형무형을 막론하고)과 물자적 기본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청년의 말을 듣고 다시금 내 마음에 타이르는 것이었다. “정신력만 건전하다면 어떠한 객관적 불리한 입장에 서 있다 해도 능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금광이나, 상업이나, 교육이나, 이 모든 것이 나 자신에게 도저히 이루어지지 못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사업 그 자신과는 별개의 관점에서 이러한 사업을 좋아한다.

—곧, 금광에 있어서, 평생에 두 번 얻기 어려운 기회를 남 먼저 파악하는 기민성과, 그리고 자아를 황활경에 유입시키는 단적(短的)이나마 빛나는 그 순간.

또 상업에 있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의 의사를 일차 압제시키는 인내력과, 그리고 차기의 성공을 위한 목전의 소리(小利)를 물리치는 함축성,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는, 완전히 자기를 죽이고 남을 위하야 몸을 바치는 희생적 정신과 거기 부대(附帶)되는 지도적 노력.

이것이다. 이상 열기(列記)한 중의 어느 것이나 내 마음에 비추어서 스스로 내 좌우명으로 삼고 일상의 심경연마의 벗으로 삼는다. — 비록 시간적으로 보아 짧을지라도, 전지전능을 경주하야 꾸미는 일의 아름다움과 기쁨! 나는 이것을 좋아하고 이것을 부러워한다. 내가 평생에 찾아 헤매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나의 심금토로의 도화선이 될 이러한 정열이다.

현재 정신적으로 불규칙적 생활을 하니, 답답하고 괴롭기가 짝이 없다. 일정한 사업을 하고 있을 때에는 한가한 시간이 몹시 그립더니 이렇게 놀고 있으니 고통 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기쁘고 행복한 때는 일하는 순간이요, 가장 슬프고 괴로운 때는 할 일이 없어 노는 때일 것이다.

아직도 청년에 지지 않을 만한 정열과 의욕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

얻음이 많고 느낌이 많은 이 땅에서, 나는 내 힘이 다할 때까지 장차 나에게 과제 될바 무슨 일에든지 힘 있는 데까지 애써보려고 한다.

—모래 위에 탑을 쌓는 노력과 불안. 나는 짐 실은 술기(수레-편집자)를 끄는 말(馬) 등에 채찍질하듯, 내 마음에도 채찍질하련다. (文貴在 기자)

▲출처=p.38~39, 《신세기(新世紀)》 1940년 1월


과거의 산 역사로 건국에 이바지하자
‐일한(日韓) 합병 당시의 회고
여운형

《신천지》 1946년 8월호에 여운형이 경술국치 당시를 회고한 글인 ‘과거의 산 역사로 건국에 이바지하자’이다. 햇수로 37년 전! 내 나이 그때에 25세, 혈기 왕성한 때였습니다. 누구나 그 나이를 경험해보았겠지만 그 나이에 그러한 일을 당하매 실로 천지가 아득하고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땅을 치고 울어도 시원치 않고 펄펄 날뛰어도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때의 분노와 원한이란 어쩌다 필설로 그릴 수 있으리까! 지금에 그때를 회고하매 어느덧 37년, 악착한 지나간 일이거니 최고(最苦)의 악몽이라고나 할까, 악몽이라기에는 너무나 무서운 현실이었습니다. 1910년 9월 29일! 이날은 조선을 위하야 불행한 날이었을 뿐 아니라 동양(東洋) 일보(一步), 더 나아가 전 세계의 평화를 교란할 불운의 씨(種)를 뿌려놓은 날이었습니다. 그때의 소위 열강이 일본의 이러한 행동을 묵인한 죄로 금반 전쟁에서 받은 과보가 얼마나 컸고 파괴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엄숙한 현실입니다.

아일(俄日·러시아와 일본-편집자)전쟁의 결과 아라사(러시아-편집자)가 패배하고 소위 보호조약이 체결되매 그때의 전 국민은 나라는 이미 기울어졌고 합병이라는 것도 이미 시간문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조선 천지는 물 끓듯 하였습니다. 그때의 조선 형편이란 개인에 비(比)한다면 사합(似恰)히 몸은 병들고 외부의 시달림은 심하였으나 병은 이미 골수에 사무쳤는지라 약효도 있을 리 없고 또는 애를 써서 약을 써보려 하는 동정하는 동리(洞里)사람조차 하나 없이 멍하니 운명하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고나 할는지요. 옆에서 울고불고하는 것은 어린 아들딸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힘이 없었습니다. 땅을 치며 방성대곡하는 사람, 기가 막혀 겅정겅정 뛰는 사람, 구국할 길이 없다 하야 자문(自刎·스스로 목을 벰-편집자)하는 사람, 때는 늦었지만 거의(擧義·의병을 일으킴-편집자)하려 의병을 모으는 이, 해외로 망명하는 이, 속세를 떠나 입산하는 이, 그야말로 형형색색의 눈물겹고 가슴 미어지는 정경이었습니다.

이보다 5년 전 보호조약 시에 나는 내가 다니던 흥화학교의 교장으로 계시던 고(故) 민영환(閔泳煥) 선생이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순절하시게 되매 20 당년의 젊은 몸은 전신의 의분으로 떨리게 되여 통곡하며 복구(復仇·복수-편집자)를 결심하고 경성을 떠났습니다. 그것이 나의 제1차 결심이었습니다. 그때 나의 생각은 사립학교를 세워가지고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의병과 연락하야 때가 오게 되면 나라를 위하야 거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강원도 강릉으로 가서 ‘초당의숙’이라는 조그마한 학교를 만들어서 그야말로 성(誠)과 열(熱)과 의(義)로 모든 고난과 싸우며 경영했던 것입니다. 때로는 경비가 넉넉지 못하였으나 열과 의로 뭉쳐진 사제는 고난이 더하면 더할수록 더욱더 단단히 뭉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만 하여도 참으로 비장한 광경이었습니다.


“올 것이 기어이 오고야 말았고나” 하는 탄식

합병되던 바로 그해 하기휴가에는 오랫동안 연락 못 되었던 동지들과도 만나볼 겸 교사도 더 초빙하려는 여러 가지 포부를 가지고 귀향했다가 합병의 비보를 접했습니다. “올 것이 기어이 오고야 말았고나” 하는 탄식과 함께 정신이 아득했습니다. 새로 초빙한 교사 5인과 다시 강릉으로 가서 여전히 교육에 종사하며 서로 동지를 규합하야 장래를 도모하기로 하였으니 이것이 재차의 결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적을 달성코저 열심 노력 중 이것이 당시 강릉서장이던 안등겸순(安藤兼純)이란 자에게 탐문(探聞)할 바 되어 그해 겨울에 학교는 봉폐(封閉)되고 우리들은 강릉 경외(境外)로 축출되어 외(外)로 나아가 대기하기로 하고 우선 만주로 향하기로 하였으니 이것이 제3차의 결의였습니다.

겨울은 가고 따뜻한 어느 봄날 혈기방장한 청년 3인이 여취여광(如醉如狂) 기뻐서 울고 어이없어 울어가면서 금강산 계곡으로 다리를 끌었으니 이것이 강릉을 쫓겨나 경성으로 향하는 우리 일행 3인의 정경이었습니다. 외국으로 가면 언제 살아서 고국에 돌아와 금강산을 보겠느냐고 금강산을 지나 춘천을 거치어 경성으로 코스를 정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어찌 인상이 깊었던지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달도 같은 달이련만 보는 이의 심경에 따라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는 격이라고 할는지요. 원체가 감개격분한 청년들이었으므로 산을 보아도 격(激)하고 물을 보아도 울던 터인데다가 유점사를 거쳐 내무재를 지나 만폭동으로 가던 도중 매월당(梅月堂·김시습-편집자)의 시를 보고는 우리의 심경을 그대로 묘사해놓은 것 같아서 세 놈이 서로 부둥켜안고 시를 읽다가 울고 울다가 시를 읽고 몇 시간을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시는 이러합니다.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기는 것이 사람의 상정(常情)이겠거늘 내 산에 올라 울고 물에 임(臨)하야 우니 어찌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기는 정이 없어서 그런 것이랴 아! 슬퍼 그러함이 아니랴!”(樂山樂水 人之常情 我卽登山而哭 臨水而哭 其無樂山樂水之興 悲夫)

일본이 조선을 경유하야 대륙 침략을 꾀한 것은 멀‐리 임진왜란 때 일은 그만두고라도 명치유신 후의 소위 정한론(征韓論)이 적극적으로 진전되어 청일(淸日) 아일(俄日)의 양 전쟁을 거쳐 보호조약에까지 발전되었다가 끝내 이 기막힌 민족적 대치욕을 당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역사를 읽을 때에 그 연대 인명 사건의 나열만을 기억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한 국가의 성쇠흥망의 원인 결과를 구명하야 국가운영에 산 교훈으로 삼아야 되겠다는 것이 식자의 주창하는 바가 아닙니까. 과거를 해부함으로써 현재 당면하고 있는 건국사업에 실제적으로 참고 활용되는 바 있어야 되리라고 생각하며 또는 이날을 회고하는 의의도 이 점에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해방된 지도 이미 1년이 지나간 오늘날 완전 자주 독립 정부가 수립되기까지는 아직도 절대한 노력이 요청되는 이때에 이날을 회고함에 당(當)하야 감상적 추억에만 흐르지 말고 산 역사로서 앞으로의 건설에 이바지함이 있어야 되겠음을 강조하는 바입니다.

7월 11일

▲출처=p.15~17, 《신천지(新天地)》, 1946년 8월


여씨 암살범 체포
‐이북서 온 19세 소년
呂運亨

《조선일보》 1947년 7월25일자 2면에 실린 여운형 암살범 체포 관련 기사다. 故 송씨 살해 범행과 일맥상통?

24일 경무부와 수도청에서 특별 발표한 바에 의하면 여운형씨를 저격 절명케한 진범인이 사건 발생 후 나흘 만에 수도청 형사대 손에 체포되었다. 이 범인은 평안북도 영변(寧邊) 출신 한지근(韓智根·19)으로 평양 기림(箕林) 소학교를 거처 영변 용문(龍文)중학을 나와 이북에 거주해오다가 달포 전에 상경했다고 하는데 23일 오후 2시경 서울 신당동 304의 243 고 송진우(宋鎭禹)씨 암살범으로 방금 복역 중인 한현우(韓賢宇) 집을 근거로서 무난히 체포된 동시에 범인이 범행 당시 사용했던 미국제 권총과 왜군 저고리에 흰 바지도 범인이 혜화동 모처에 파묻었던 것을 발견 회수했다고 한다.

범인의 배후 관계와 범행동기 기타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방금 추궁 중에 있거니와 측문한 바에 의하면 범인은 평양에 있는 백남석(白南錫)이란 사람의 추천장을 가지고 상경하여 한현우 집에 기거해 있었는데 백남석인, 즉 한현우의 공범으로서 수배 중의 인물이라는 것과 한편 문초 당시에 범인이 흥분하여 “좌우를 막론하고 박헌영, 여운형, 송진우 등 국내를 혼란케 하는 지도자는 다 죽여야만 나라가 바로 서겠기에 일개 국사로서 감행한 의거(義擧)인데 무엇이 잘못이냐”고 공술한 것 등으로 보아 송진우씨를 암살한 한현우의 범행 사정과 일맥 상등한 바 있다고 보는 편이 유력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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