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꼬꼬무3 김상옥 쌍권총

호크준 2021. 11. 18. 15:11
728x90
반응형

 

김상옥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의열단의 일원이었으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경관들을 사살하여 항일 무장 투쟁의 발판을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상옥 의사가 순국한 이후 국내외에서 활발한 항일 무장 투쟁이 전개되었으며 거사 당시 쌍권총을 사용하였다는 점도 유명하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사람이 진짜 김상옥이 맞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물론 김상옥의 업적을 폄하하려는 의도의 주장이 아니라,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서울역에서 암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경찰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면 당연히 총독의 개인 경계도 강화될 것이 뻔한데 그런 거사를 힘들게 만드는 우를 범할 이유가 있었겠냐는 것. 일제는 진짜 장본인을 찾지 못하고 김상옥의 소행으로 단정해서 그를 추격했다는 것이다.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을 실제로 실행한 인물로는 무명지사 김상환, 맹호단원 이강연, 고려공산단원 이한호 등이 제기되고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당시에 암살하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하여 목표를 종로경찰서로 변경한 것일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반응형


일반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이 무장 투쟁에 사용하던 폭탄이 다소 만듦새가 조잡했던 것과는 달리, 종로경찰서에 투척된 폭탄은 위력이 대단했다고 한다.[7] 당시로서는 이 정도의 고성능 폭탄을 제조할 기술력을 지닌 독립운동 단체가 의열단밖에 없었던 것이 거의 분명하므로 김상옥의 의거로 보는 것이 맞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것은 일종의 실험적인 의거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제조된 폭탄의 위력이 실전에서는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는지 시험도 해 볼 겸 조선총독부와 일본 경찰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는 것이다.

김상옥이 전투에서 사용한 권총. 실물은 안타깝게도 찾지 못했고, 증거품으로 찍힌 상단의 사진만 전해진다. 총열이 조금 더 짧다는 점과 방아쇠울이 다르게 생겼다는 점을 빼면 스미스 & 웨슨 38 DA Revolver 38 S&W와 비슷하다. 형태로 보아 은닉이 쉽도록 개인적으로 개조한 모양이다.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및 독립장에 추서 되었다.
국가보훈처에서 1992년부터 선정/발표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최초로 선정된 인물이다. (1992년 1월)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는 김상옥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의사가 순국한 곳이 있는 종로4가 북쪽 효제초교 앞길은 그의 이름을 딴 "김상옥로"로 명명되었다.
이상의 친구로 유명했던 야수파 화가 구본웅이 중학생 시절 그 김상옥의 순국 현장을 목격하였는데, 이때의 강렬한 영향이 그의 야수파 화풍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생전 별명은 '동대문 홍길동'이었다고 한다. 본진과 같은 영덕철물점을 중심으로 독립자금을 지원함은 물론, 무장투쟁을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여,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기마경찰을 맨손[8]으로 때려눕혀 검을 빼앗았을 만큼 무술에도 능했으며, 당시 총을 다루는 솜씨는 말 그대로 명사수라 불릴 만큼 비범했다고 한다.[9]
사회 활동에서도 상당히 시대를 앞선 사람. 자신이 설립한 '영덕철물점'이라는 곳을 기반으로 능란한 사업수완을 발휘해 독립자금을 조달했으며, 당시 철물점 종업원들에게 요즘의 '노동조합'과 같은 단체를 설립해 자신들의 권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단발령 이후 사람들 사이에 잘린 머리를 감추고 다니기 위해 모자가 유행했는데, 이것이 대개 수입산이지라 말총을 이용한 모자를 창안해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의 항일 정신을 대표하는 일화 중 하나로, 김상옥 의사가 중국에 있을 때 오랫동안 함께 활동하던 여류 독립투사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일이 있었다. 이때 김구는 김상옥에게 돈을 주며 '관'을 사 오라고 했으나, 김상옥은 그 돈으로 관을 사지 않고 권총을 사 왔다고 한다. 동료의 원한을 갚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관보다는 총이 더 필요하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물론 돈을 마련해 장례식을 위한 관은 따로 구입했다고 한다.[10]
보통 여느 독립투사들이 벌인 의거를 기리는 행사를 할 때 '의거 기념식'이라는 표현을 쓰고 사망자들은 순국 '추모식'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런데 김상옥 의사는 사망일이 1월 22일임에도 '순국 추모식'이라는 말 대신 '시가전 승리 기념식' 또는 '독립활동 기념식'이라는 용어를 쓴다. 비록 일본제국 경찰과 서울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시고 마지막 한 발로 순국했으나, '시가전'이라고 칭송될 만큼 혁혁한 공로를 세운 데다 당시 일제에 준 충격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역사가에 따라서는 김상옥 의사가 펼친 활약으로 일본에 억눌린 우리 민족이 저항을 위한 의지를 되찾았고 이후 항일 무장투쟁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 생존 애국지사 중 한 명은 어릴 적 신문에 난 김상옥 의사의 투쟁을 보고 '일본 놈들은 수천 명인데 왜 이분은 홀로 싸우시는가?'라며 독립운동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순국하는 당시의 일화에도 일본제국 경찰들이 김상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잘 나타난다. 김상옥 의사는 마지막 총알로 자결한 후에도 양손에 권총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멀리서 이 모습을 본 일본제국 경찰들은 김 의사가 살아 있을까봐 다가가지 못했고, 결국 김 의사의 어머니를 보내 생사를 확인하게 했다고 한다.
종로 5가 효제동 김상옥 의사 의거터라는 정류장(정류장 ID : 01-204)이 있다.

728x90
반응형

'유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천 여경 도망~~  (0) 2021.11.19
의자의 반란 똥고 파열!  (0) 2021.11.19
에이핑크 손나은 오하영 합체  (0) 2021.11.18
은근슬젖 누나 오우야  (0) 2021.11.18
시상식 여배우 노출에 대한 아나운서의 일침  (0) 2021.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