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꼬꼬무3 우범곤 우순경 사건

호크준 2021. 11. 25. 08:59
728x90
반응형

 

1. 개요[편집]


대한민국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대량살인마로 범행 당시 직업은 경찰관, 계급은 순경이었다.

통칭 우순경. 이에 따라 그가 1982년에 저지른 대량살인 사건을 '우순경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국내 최다 살인 기록인 62명을 연달아 살해한, 연쇄살인과는 다른 연속살인범[3]이다. 당시에는 해당 사건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후 기네스에서 혹시나 이 기록을 경신한다면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 나올까 봐 범죄 관련 항목은 기록하지 않기로 했다. 기우가 아닌 것이, 실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정남규는 유영철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며 자신이 더 최고의 살인마가 되어야겠다는 경쟁 심리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 이 기록은 2011년 노르웨이 연쇄 테러범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빅'이 경신했으나, 여전히 국내에선 우범곤이 가장 많은 살인을 저질렀다.

2. 생애[편집]

경상남도 부산시 동구 초량동 245의 8번지에서 경찰관의 네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본적은 경상북도 월성군 외동면 문산리 537[4]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별다른 말썽 없이 평범하게 보냈으며, 경찰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장차 경찰관이 되어 아버지처럼 권총을 차고 일하겠다고 뽐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학교 진학 후부터 내성적이던 성격이 두드러지고 학업에도 흥미를 잃어 무단결석[5]이 2년 동안 30일이나 되었으며 고교 시절에는 졸업 당시 65명 중 63등으로 열등생이 되고 말았다. 고교 재학 시절에는 분을 이기지 못해 유리창을 깨고 그 파편으로 배를 긋는 등의 자해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특히 고교 3학년때 아버지가 진급을 앞두고 대장암으로 병사하면서 가세가 기울자 우범곤은 성격 자체가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했으며[6], 특등사수로 뽑일 정도로 사격 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반응형


제대 후 경찰관이 되었으며 초임지는 부산직할시 남부경찰서 감만3파출소[7]였다. 이후 서울특별시 101경비단에 선발되어 청와대 경호에 근무했으나 중도에 전출당하여 경상남도 의령군의 궁류 지서[8]로 좌천되었다. 부산에서 근무할 당시부터 피의자들을 함부로 다루거나 윽박지르는 등 포악한 성격을 드러냈다고 하며, 당시 동료 순경에 따르면 평소 유순하다가도 술만 마시면 성격이 난폭해져 꼭 무슨 사고를 낼 사람 같았다고 한다. 청와대 경호에서 제외된 것도 성격이 너무 거칠어 근무 부적격자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었으며, 전출된 후에도 술만 마시면 행패가 심해 미친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잔혹성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총기 난사 사건[편집]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3.1. 발단[편집]

1981년 12월 30일 오후 5시, 궁류지서로 전근 온 뒤 이듬해 2월 8일에 하숙을 하던 우범곤은 이웃집에 살던 전(田)양과 사귀게 되었고 3월 9일에 전양의 집에서 동거 생활을 한다. 동거에 들어가기 전에 전양의 부모는 결혼한 뒤 함께 살라며 만류했지만 우범곤이 결혼 비용이 없다며 가을로 식을 미루기로 하고 당장 혼인신고부터 하겠다고 고집했다. 가뜩이나 집안이 가난해 늘 열등 의식에 젖어있던 우범곤은 식도 올리기 전에 여자 집에 얹혀살게 되면서 자신의 무능함에 심각한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고.

3.2. 전개[편집]

1982년 4월 26일, 그날 우범곤은 저녁시간 근무를 위해 낮 12시경에 집으로 들어와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잤다. 그가 잠든 와중에 동거녀가 그의 몸에 붙은 파리를 잡기 위해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쳤고, 그 둘은 이를 계기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화를 미처 식히지 못한 채 우범곤은 오후 4시경 지서로 간 뒤, 저녁 7시 반경에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만취한 상태에서 코피가 날 정도로 동거녀를 주먹으로 폭행했고, 같은 집에서 살고 있던 동거녀의 친척 언니가 뛰어 들어와 말리자 친척 언니의 뺨마저 닥치는 대로 때리며 난폭하게 굴었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동네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사건의 전말을 들은 그들이 동거녀를 두둔하자, 우범곤은 다시 집을 나갔다.

지서로 향해 지서에 배속된 육군 방위병들과 소주를 퍼마시던 우범곤은 동거녀의 남동생이 와서 경찰이면 다냐고 소리를 질러대자 폭발, 카빈총을 장전했고 만류하는 방위병들을 총을 쏴 내쫓은 다음에 예비군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M1 카빈 2자루, 실탄 180발, 수류탄 7개 등을 탈취했다.

밤 9시 40분 - 지서를 나온 우범곤은 마침 앞을 지나던, 대구에서 표구사를 하는 26세 남자[9]에게 총을 쏜 것을 시작으로 궁류면 토곡리 재래시장으로 달려가 조준 사격하여 장을 보러온 마을주민 3명을 살해했다.

밤 9시 45분 - 마을의 통신을 차단하기 위해 궁류우체국[10][11]으로 가서 여성 교환원[12] 2명과 숙직 중이던 집배원 1명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교환원이 숨지기 직전, 마을 이장 집의 행정전화와 의령우체국 간의 코드를 연결했던 덕분에 주민에 의해 신고(22시 34분)가 가능했다.

밤 10시 - 그는 곧 압곡리 매실부락으로 가서 10여 분간 총기를 마구 난사하였고, 주민 4명 인근 마을의 2인을 살해했다.(전양은 생존했지만 전양의 가족을 살해.)

밤 10시 10분 - 그는 운계리 시장으로 달려가 주민 7명을 살해했다.

밤 10시 50분 - 그는 상갓집에 난입하여 “비상이 걸렸다”고 말하고는 문상을 한다는 핑계로 부의금 3천 원을 내고[13] 문상객들과 어울려 10여 분간 함께 술을 마신 뒤 갑자기 총을 난사하여 상주 일가족[14] 등 12명을 살해하였다. 이후 그는 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총을 난사하여, 이곳에서만 무려 23명을 살해했다.

다음 날인 27일 새벽 5시 35분 - 그는 평촌리 마을에 다시 나타나 알고 지내던 주민의 민가에 침입했다. 그는 일가족 5명을 깨운 뒤 갖고 있던 수류탄 2발을 한꺼번에 터뜨렸고, 그 자리에서 우범곤 본인을 포함해 4명이 폭사했다.

3.3. 경찰의 한심한 대응[편집]

근무지를 무단이탈해 온천접대 후 술을 마시고 돌아오던 궁류지서장 허창순 경사 일행은 밤 22시 50분경 길에서 만난 주민에게 신고를 받지만 무시하고 궁류지서로 들어온다. 그곳에서 우범곤이 무기를 탈취해 총격을 벌이고 있다는 보고를 듣자 총격 현장에 자기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며 도피했다.

한편 마을에 살던 의령군 민방위과 공무원의 사건 전파를 받고 의령경찰서 경무과장 신현기와 보안과장 김영석 휘하 전투경찰 30명이 자정 무렵 도착했으나 우범곤의 소재를 파악하기는커녕 피격을 두려워하여 마을 초입 다리 밑 등 곳곳에 숨어있었다. 후에 경찰은 이를 매복이었다고 변명했으나 여론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주민 살상이 진행 중인데 경찰은 현장에 진입하지 않고 웅크려 있었다는 것이며 더구나 매복을 다리 밑에서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당시 관할 책임자인 의령경찰서장 최재윤 경정(1982년 당시 57세)은 다음날 부산에서 서장회의가 있다는 핑계로 하루 일찍 부산으로 이동하여 근무지를 보고 없이 무단이탈한 상태였다. 보고를 받고 복귀하여 범행 지역에 이르는 다리에 도착한 것은 익일 새벽 1시 20분이나 되어서였다. 현장에 도착한 의령서장은 경찰들을 규합하여 범인 수색에 나서기는커녕, 곳곳의 사상자를 목격하고 두려움에 빠져 곧바로 궁류지서로 도망쳤다.

지서에 도착한 의령서장은 우범곤이 많은 실탄을 가져갔다는 보고를 받자 더욱 두려움에 빠져 지서 안에만 틀어박혔다. 게다가 지서에서 마을 스피커로 경보를 발령하고 사이렌을 울리거나, 또는 예비군을 동원하거나 의령서 휘하 인근 지서에 경찰 지원을 지시하지도[15] 않고 단지 내무부에 상황 보고만 하였을 뿐 아무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이는 지서에 대기하고 있던 경무과장과 보안과장도 마찬가지로서, 만약 이들이 밤 22시 24분에 처음 신고를 접수한 즉시 경보 방송을 발령하였다면 적어도 희생자의 절반을 구했을 수도 있었다.

사건 종료 직후 현장을 지키는 39사단 기동타격대


새벽 2시에는 주민 2명이 목숨을 걸고 산을 넘어와 출동을 재촉하였으나 서장은 날이 어둡다며 이것도 거부하였다. 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마산시·진주시의 기동대가 궁류에 도착하였으나 결국 사건은 우범곤의 자폭으로 종료되었으니 요약하면 경찰력의 개입이나 저지없이 주민 살상이 진행되었고 속수무책으로 종료됐다.

게다가 위 타임라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범곤이 26일 23시경부터 다음날 자폭하는 새벽 5시경 사이에 무려 6시간 가량 딱히 범행을 실행하지 않고 어딘가에서 조용히 있었는데, 만약 그가 쉬지 않고 계속 날뛰었다면 이 때 경찰은 아무 역할도 하지 않고 틀어박혀 있었으니 피해가 몇 배로 훨씬 커졌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3.4. 희생자[편집]


자신을 위로해 주는 경찰관을 경계하는 어린이. 이 아이는 우범곤의 학살극으로 형을 잃고 졸지에 6대 독자가 되었다. 훗날 우순경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출연하여 이 사진에 대해 설명하기를 "누구도 믿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우순경부터가 경찰이었으니 당연한 부분.


이 사건으로 인하여 무려 62명의 주민들이 사망했고, 33명의 부상자도 발생했다. 6명의 희생자는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다가 총상이 악화되어서 사망했다.

우범곤이 의령군 일대의 네 개 마을을 거의 쓸다시피하여 살인을 저지르다보니, 시골사회 규모를 감안하면 심대한 피해를 남겼다. 조상 대대로 친척 일족이 모여 사는 산골마을의 특성상 일가족이 모조리 몰살당하거나, 가족들을 모두 잃고 일가 중 혼자만 살아남은 경우가 많았다.

의령지서에 돌을 던지며 항의하는 주민들


우체국에서 숙직하다 참변을 당한 집배원의 경우, 그의 부인마저 집에서 우범곤에게 살해되는 바람에 슬하의 세 남매는 하루 아침에 고아가 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첫번째 희생자인 청년과 우체국에서 피살된 교환원 아가씨는 미혼으로 사망한 것이 비통하게 여겨져 유족들끼리 합의하에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기도 했다. 범행이 일어났던 의령 지방에는 아직까지도 4월 26~27일 즈음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고 한다.

3.5. 피해가 커진 이유[편집]

이날은 반상회를 하느라 마을 주민들이 곳곳에 모여 있었고 밤늦게까지 불을 켠 집이 많았다. 또 기강 해이로 경찰의 근무지 무단이탈이 만연했는데, 궁류지서의 다른 경찰관 3명도 반상회에 참석하려고 근무지를 무단이탈한 상태였으며, 지서장 역시 마을 유지의 온천 접대를 받으러 지서를 무단이탈한 상태였다. 지서는 다른 근무자 없이 텅 비어 있는 상태였으며 이에 우범곤은 무기고에서 다량의 화기를 용이하게 탈취할 수 있었다.

우범곤의 직업이 경찰이었으며 사건 당시에도 근무복을 착용하고 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 때문에 주민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우범곤을 맞이했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이는 노르웨이 연쇄 테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당시는 무장공비가 심심치 않게 출몰하던 시대였으므로 주민들은 총소리를 무장공비가 나온 것으로 생각했고 경찰인 우범곤이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했어도 공비소탕 작전을 수행중인 것으로 인식했다.

3.6. 이후[편집]

위 사건은 대량학살급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사건 하루 뒤 조간신문이 아닌 석간신문에 보도됐는데, 이는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 이후 주재기자 제도가 금지되어 연합통신 타전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당시 연합통신이 보낸 것도 내용이 엉성해 뉴스 당일 오후에 기자를 파견하고 나서야 자세히 알려졌다. 사건 몇달 후 '충견 바둑이 오보 사건'[16]을 계기로 주재기자제 재도입 문제가 수면에 떠올랐다.

구속되는 궁류지서장


국민을 지켜야 할 경찰이 전대미문의 흉악범죄를 저질렀다는 충격성과, 사건 진행 당시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들의 비열함과 무능함에 피해가 커졌다는 점 때문에 전국적으로 여론이 폭발하여 전두환 정부는 내각 사퇴 압력에 직면했다. 한편 정부합동조사반은 이 사건이 상부에 보고도 늦고 출동도 늦은데다 진압마저 미온적이었기 때문에 궁류지서장 허창순, 의령서장 최재윤을 파면·구속 기소하고 관계자 수 명을 직위해제시켰다. 내무부 장관이던 서정화[17]는 책임을 지고 문책성으로 사임하였고 후임으로 체육부 장관이었던 노태우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회 내무위에선 야당 의원들은 이 사건이 단순한 치안문제가 아니라 보고 체계와 무기 관리 등 당국의 치안정책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내각 총 사퇴까지 요구했다.

의령군을 찾은 전두환의 모습을 담은 1982년 5월자 대한뉴스

전두환 정권은 지역 주민들의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해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의령군을 찾아 주민들에게 사과와 보상을 약속하는 한편, 국가 차원의 대책위원회를 열어 대대적인 보상을 실시했다. 사건이 일어난 의령군 등 서부 경상남도 지역은 대구경북과 함께 대한민국 제5공화국과 민주정의당의 핵심 지지기반이었으므로[18] 전두환으로서는 아무리 간선제를 한다 해도 눈치를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었다. 유족들에게는 대학등록금 및 의료비 지원 방안이 이루어졌고 궁류면에 대한 인프라 구축 사업 역시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시작되었다.

먼저 의령읍~정곡면 간 11km 국도를 새로 포장한 뒤 군도였던 의령~궁류 간 12km 도로를 지방도로로 승격해 경상남도 예산으로 새로 포장했다. 또한 마을 안길 포장, 교량 가설, 주택 개량, 농로 개선 등 총 12개 부문 환경개선 및 생산기반 시설 사업이 진행되었고, 평촌마을 윗쪽에 벽계저수지 및 보가 설치돼 궁류면은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곳이 됐다. 그러나 주민들의 절반 이상이 궁류면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이 사건으로 경찰공무원 임용규정이 개정되어 경찰공무원 응시자에 대해 고졸 이상부터라는 학력제한 규정이 제정되었으며, 인적성 검사와 전과 등 과사실 유무에 대한 조회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사실 우범곤은 전문대 중퇴 학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학력 제한이 예전부터 있었다 해도 충분히 응시할 자격이 되었다.

당시 의령경찰서장 최재윤에 대한 대법원 공판[19]에서는 형법 직무유기 관련 중요 판례로 "...직무유기죄가 성립하려면 주관적으로는 직무를 버린다는 인식과 객관적으로는 직무 또는 직장을 벗어나는 행위가 있어야 하고 다만 직무집행에 관하여 태만, 분망, 착각 등 일신상 또는 객관적 사정으로 어떤 부당한 결과를 초래한 경우에는 형법상의 직무유기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 조치가 다만 적절하지 못하였다는 사정만으로는 형법상 직무유기죄가 성립할 수 없는 것"으로 결국 직무유기죄는 불성립되었다. 그리고 파면처리되었던 것도 징계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았다고 무효가 됐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엄청난 사상자가 생겼는데도 테러가 아닌 경찰이 저지른 범죄인데다 대한민국 공권력의 역대급 흑역사라서 대중매체에선 잘 안 다룬다. 그나마 2008년 7월 15일 tvN <범죄의 재구성>과 2011년 11월 6일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언빌리버블 스토리' 코너에서 각각 다뤘다.

유명 역술가 차길진[20]은 어떻게 맨 정신인 사람이 파리 한 마리 때문에 사람을 수십 명이나 죽일 수 있느냐며 이것은 의령에서 죽은 빨치산 56명의 원혼 때문이라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급의 주장[21][22]을 했다. 당연히 과학적 증거 따윈 없으며 헛소리에 가깝다. 단, 차길진의 아버지가 6.25 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에 참가한 차일혁 총경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빨치산 운운 발언의 근원이 어디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법도 하다.

사건으로부터 2년 후인 1984년 미국 콜로라도에서 결성된 하드코어 펑크 밴드 'Bum Kon'은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으며, 앨범을 무려 세 개나 냈다. 디스코그래피 2008년에는 이 밴드의 앨범이 CD로 리마스터되어 나오기도 했다. 앨범 리뷰 번역기 돌린 한국어와 북한(...) 그림이 인상적이다.

1999년에 신승수 감독, 조재현, 임하룡 주연의 한국 영화 얼굴이 우순경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실제 사건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으며, 순수했던 경찰 조재현이 시골의 작은 사회에 점차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막판에 총기난사하는 것만 같다. 대체 왜 포스터에 충격 실화라면서 과대광고를 했는지 의문일 따름. 오히려 영화는 살인자에게 그 나름대로의 정당성이 있고, 피해자들에게도 모종의 책임이 있는 것으로 묘사했으니 이 영화를 실화라고 하는 것은 실제 피해자들에 대한 모독이다. 참고로 흥행 기록은 관객 1천 명이 전부이다. 다만 개그맨 임하룡의 정극 데뷔작으로서 전혀 우스운 모습이 아닌[23] 연기가 돋보였고 원로 배우 윤인자[24]의 마지막 출연작으로의 가치가 있다.

2012년에 연재됐던 네이버 웹툰 연: 시즌2의 진달래 에피소드가 이 사건을 직접 다루고 있다. 문제는 작가인 구아진[25]이 픽션임을 강조하면서 이 사건을 거대한 정치적인 음모로 보일 수 있는 뉘앙스가 있었다. 이 사건의 생존자였던 아이가 방송국 PD가 되어 이 사건을 다시 취재하면서 당시 우범곤은 술에 취하지 않았다거나 사실은 범인은 여러 명의 사격 전문가들이었다거나 이 사건 이후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내무부 장관이 되어서 대선가도에 들어서게 되어[26] 최종적으로는 높으신 분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거나, 이 사건으로 전투경찰이 생겼다거나[27] 방송은 권력이 장악한다거나 하는 가설을 내세워 이야기를 끌고 나가고 있다. 당연히 댓글란은 전쟁터 수준, 오죽했으면 우범곤 사건을 5공화국 사주로 돌리는 만화 그릴 수 있으면 5.18도 북한의 사주로 일어난 거라는 만화 그려도 되는 거냐고 항의도 있었고 구아바 자신도 지역드립으로 마음고생이 심하다고 한다.

이야기 자체는 어린시절의 트라우마와 아동학대를 경험한 PD가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사회부조리에 눈을 뜨고 언론 자유 사수에 앞장선다는 내용인데, 거창하게 풀었던 이야기에 비해 주제의식은 좋지만 끝이 미약하였고 굳이 의문 사건도 아닌데[28] 지나치게 음모론적으로 풀고 나갔다는 지적[29]이 있었다. 아무래도 민감한 소재인 만큼 그런 듯.

2017년 3월 나홍진이 이 사건을 영화화 한다는 소식이 있지만, 2년 전 작가와 계약을 했을 뿐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고 한다.


2018년 7월 5일 KBS2 <속보이는 TV 인사이드>에서 이 사건을 재조명했다. 당시 생존자, 피해자 가족의 인터뷰와 재현 영상으로 구성했고 현재는 당시와 달라졌지만 당시 실제 장소를 찾아가는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특히 현재까지 외형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는 무기고[30]도 볼 수 있다.

웹툰 악의 혈통에서 매을리 마을회관 살인 사건이 이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