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꼬꼬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

호크준 2021. 12. 16.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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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1948년 9월 28일 대구 남산동에서 아버지 전상수와 어머니 이소선 사이에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고운 심성과 다정다감한 성격, 불의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 기질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재단사였던 그의 집안은 어렸을 때부터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다. 부산으로 이사갔다가 서울로 이사온 후 아버지가 봉제 공장을 차려 어느 정도 먹고 살 수준의 생활을 영위한 적도 있지만 4.19 혁명 직후 거액의 사기를 당하는 통에 온 가족이 다시 가난의 구렁텅이로 빠졌다. 밥을 못 먹는 일은 약과에 불과했으며 이는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시절까지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니던 초등학교 마저 중퇴하고 17세 무렵 무일푼의 몸으로 상경해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점에 이른바 '시다'라고 불리는 재단 보조로 취직하게 된다. 이후 재단사로 일하던 중 재단 보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 박봉, 질병(폐렴 등)으로 시달리는 모습을 보며 그러한 노동 현실의 타파와 개선을 위한 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전태일은 모범 업체라고 하여 요즘의 '사회적 기업'과 같은 개념의 기업체를 만들어 근로기준법 준수 및 직공들의 근로 여건 등을 개선시켜 평화시장에 있던 업체들에게 직공들의 근로 여건 개선을 촉구하는 시발점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자본금이 부족하여 좌절되었다. 사업 기획서까지 만들어 두고 작업장 배치와 근로 조건 등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들을 세워두었다.

그러던 중 근로기준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그 내용을 독학하려 하였으나 근로기준법 전문이 국한문 혼용인지라 내용을 알 수 없어 "대학을 나왔더라면 또는 대학에 다니는 친구라도 있었으면 알 수 있었을텐데..."라며 한탄[10]했다고 한다.[11][12] 『전태일 평전』을 통해 알려진 그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의 대학생들에게 현실 참여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해설서를 구입하여 밤낮을 안 가리며 읽었는데 말이 해설서지 법률 용어 투성이였기에 초등학교 중퇴 학력의 전태일에게는 악전고투였을 것이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살던 '광식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나이 든 대학생을 자주 찾아가 용어의 뜻을 묻기도 했으며 어떤 날은 해설서 한 페이지 읽는데 하루를 꼬박 새운 적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읽어낸 근로기준법상의 내용과 현실의 괴리를 절감한 그는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 운동 조직인 '바보회'[13]를 창립하여 현재 근로 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막장 현실 속에서 봉제 공장주들에게 밉보인 전태일은 직장에서 해고된 후 평화시장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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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재단사로 취직이 되어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이전 바보회 활동을 같이 하던 친구들을 규합하여 '삼동친목회'를 조직해 한층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다. 청계천 피복 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노동 실태 설문조사 결과를 노동청에 제출한 것이 경향신문에 실리며 주목을 받은 후 사업주들과 협의를 벌이기도 했으나 현실의 장벽에 막히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로 정재계는 그들의 활동에 '사회주의 조직'이라는 빨간 딱지를 붙이고 노동자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당시 한국에는 그럴싸한 근로기준법은 있었으나 형식적이었으며 감독 관청도 전혀 이를 지키려 하지 않았다.[14] 이에 깊은 좌절과 비애를 느낀 전태일은 결국 분신을 택하게 된다. 조영래에 의하면 전태일은 "누구 한 사람 죽는 것처럼 쇼를 한 판 벌려서 저놈들 정신을 번쩍 들게 하자[15]"고 계획했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앞에서 노동자들의 집회 중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가 경찰과 고용주 측에서 동원한 패거리들에 의해 찢겨지고 짓밟히자 전태일은 정확히는 평화시장에서 남쪽에 자리한 동화시장 계단에서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사전에 자신의 친구 김개남에게 자신의 몸에 성냥을 그어 달라고 말했던 것에 따라, 익명의 친구는 뒤에서 불을 붙여, 이 사회에서 형식에 불과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선언하고 자신도 불에 함께 타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에 의하면 전태일의 몸에 불을 붙여준 동지가 있었다 한다.

전태일은 그의 손에 들린 법전과 자신을 태우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고 외쳤다. 조영래에 의하면 당시 불이 붙은 전태일을 향해 "근로기준법 책을 전태일의 불길 속에 집어 던졌다[16]"고 한다.

이후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이미 엉덩이를 제외한 전신에 3도 중화상을 입은 상태인데다 병원 측에서도 환자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응급 치료 이외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근로 감독관마저 치료를 위한 돈 보증을 거부했다. 후에 모 대학의 한 교수님이 술회하기를 정말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당시 사회상이었다고 한다.[17] 결국 그는 명동성모병원[18]으로 옮겨졌고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어머니,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1970년 11월 13일 밤 10시에 숨을 거두었다.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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