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꼬꼬무 3 마약왕 쿤사

호크준 2022. 2. 2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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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왕

 

미얀마의 군벌, 마약왕으로 쿤사는 태국어로 '촌장'이라는 뜻의 별명이고 본명은 장치푸(張奇夫)이다.

샨족 독립운동을 지휘하던 몽타이 군의 수장이었다.

1934년 중국계 화교 아버지와 샨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적엔 불교 수련생으로 잠깐 공부한 것 빼고는 별다른 교육도 받지 못하고 일찍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국공내전이 끝나고 국부천대의 혼란기 속에 중국에서 패배한 

국민당 잔당은 운남성에서 미얀마로 패주했는데 이때 샨족의 영토로 들어온 국민당 장교에게서 

체계적인 군사 교육을 받고 국부군 잔당의 장교로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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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경 국민당 잔여군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군대를 꾸렸고 이때 

태국군과 충돌한 국민당쪽의 난민들과 군인들을 흡수하여 세력을 크게 성장시켰다. 

장수천이라는 중국인 참모를 얻었는데 그는 다방면에서 활약하며 쿤사를 보필했다. 

한편 쿤사는 아편 재배와 밀매로 돈을 얻은 뒤 라오스와 태국의 암시장에서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넘처나던 무기를 사들여 무장을 강화하여 독자적인 군벌로 떠올랐다. 

그는 세태에 맞게 처신했는데 반군과 미얀마 정부군을 오가면서 자신의 세력을 길렀다.



1967년 국민당 잔당과 라오스 접경지대에서 마약 이권을 두고 한바탕 전투를 벌였는데

둘이 싸우는걸 지켜보던 라오스 왕국군이 개입하여 쿤사와 국민당 잔당군 둘 다 패퇴 시켜버렸다. 

이 사건으로 쿤사의 세력은 일시 감소하였고, 결국 그는 다른 샨족 무장 투쟁 조직과의 동맹을 

고려하게 되었다.



1969년 당시 미얀마의 소수민족 탄압에 저항하여 무장투쟁을 하고 있던 샨족의 군대는 쿤사를 설득하여 샨족편으로 오게 하였고 그는 이를 수락하였지만 회의 내용이 미얀마 정부군에 유출되어 체포되었다. 화가 난 그의 부하들이 러시아 의사를 납치하여 그를 석방하도록 요구했지만 이는 거절되었다. 그는 나중에 태국의 총리가 되는 태국 장군인 끄리앙삭 차마난의 중개를 받아 1974년 석방되었다.[1]



이후 본격적으로 샨족과 연합하여 샨족의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골든 트라이앵글 지대인 태국 치앙라이주 반힌땍에 본부를 두고 미얀마-태국을 오가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얻기 위한 명분으로 아편과 헤로인을 생산해 판매하였다. 이때 베트남 전쟁의 영향으로 미국인들이 동남아시아에 많이 들어왔는데 이들의 중개로 미국에 헤로인을 팔아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2]



이 돈으로 샨족 자치주의 사회 인프라 시설을 확충하고 교육과 의료, 복지에도 신경을 써 그는 확고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또 부패한 태국과 미얀마 관리들을 매수하여 그들과 친분을 다지면서 편의를 얻었다.​



그러나 미국으로 헤로인 밀매가 계속되고 한때 미국 헤로인의 60%가 쿤사에게서 나온다는 말까지 있자[3], 이는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게 하였고 결국 미국은 태국을 압박하여 그의 제거를 사주했다. 태국 정부는 그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군대를 동원해서 본격적으로 전투를 치렀고 그는 결국 태국에서 물러나 미얀마 호몽으로 후퇴했다.



1982년경 미얀마로 밀려난 쿤사의 군대는 현지 공산반군 및 지역 군벌을 격퇴하고 순식간에 미얀마-태국 국경지대 지역을 장악했다. 공산 반군들과 쿤사는 사이가 안좋았는데 그가 국민당 잔여세력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고 미얀마나 태국 정부가 공산 반군들을 싫어하여 쿤사에게 공격을 사주했기 때문이다.[4] 이런 정부 입장에서 보기 좋은 행동과 미얀마,태국의 정부 인사들에게 뇌물도 많이 뿌렸기 때문에 그의 마약 사업은 상당수 묵인 받을 수 있었다.



1985년 자신의 샨 연합군과 또 다른 샨족 반군인 모헹의 타이 반란군을 합병하여 정식으로 몽타이 군을 세웠다. 이후 마약 무역을 재개하고 미얀마-태국의 정부 인사들과 다시 우호를 다졌다. 특히 한때 싸웠던 태국 정보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다시 수립했다.



1987년에는 미국의 요구로 미얀마가 토벌을 시도했으나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유야무야 넘어가기도 했다. 이미 쿤사는 미얀마 정부군과 어느정도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돈으로 매수도 잔뜩 시켜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앞날은 탄탄 대로였다. 샨족 독립운동을 지휘했지만 현실적으로 완벽한 독립은 어려운 상태였고 자치를 보장 받는 선에서 미얀마 정부와 협조하기로 한 것이다.​



1988~89년경 호주 언론인이나 미국 언론과 인터뷰를 했는데 자신의 군대의 세력을 2개 사단급인 2만명이 넘는다고 자랑했다.[5] 마약 밀매로 얻은 쿤사의 재산은 50억 달러에 달했고 헤로인 밀매 이권은 연간 60억 달러에 달했다. 이렇게 번 재력을 이용해 군대를 무장시켜서 장비도 좋았다. 공습을 막을려고 대공 미사일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 DEA는 쿤사의 목에 20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탄탄대로일 것 같은 쿤사는 1991년 모헹이 죽자 몽타이군에 대한 그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걸 느꼈다. 이에 샨족의 주요 인사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열어 1993년경 샨족의 독립국가를 세우고 샨족의 주석으로 취임했으나 몽타이군 내부에서 그의 지도력에 의심을 가하고 그가 마약 이권을 위해 샨족 독립운동을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93년 ~ 1995년경 결국 미국의 압력을 받고 겸사겸사 샨족 독립운동을 진압 할려는 미얀마군과 싸우게 되었고, 몽타이군과 미얀마군의 교전으로 수천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거기다가 내부분열까지 일어났는데 쿤사가 먀악 수입을 제대로 배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몽타이군의 일파가 따로 떨어저 나가 독립하기도 했다.



또 와족의 와방연합군과 치열하게 싸우면서 군사력을 소진했고 헤로인 루트가 여러 군데가 생기면서 그의 수입도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다.



내우외환이 계속 일어나고 수입도 감소하자 그는 결국 전부터 우호를 다지고 있던 미얀마 군부의 고위급 장군들과 몰래 회담을 가졌다. 그는 안전과 완전 사면을 보장 받는 댓가로 1996년 미얀마 정부에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군대의 해산을 선언하고 완전 항복하였다. 미국은 그를 미국으로 보내라고 했으나 미얀마 정부에 단칼에 거절되었다. 특히 샨족을 회유하려는 미얀마 정부의 생각에 따라 그는 명예 장로 칭호를 받고 재산도 보전 받았다.



그의 항복으로 골든 트라이앵글의 마약 재배가 일시 감소했으나 이후 그의 항복을 수긍하지 못한 샨족 군벌의 잔여세력[6]과 와족의 와방연합군 등이 삼합회와 손을 잡고 다시 재배를 하여 골든 트라이앵글의 마약은 완전히 뿌리 뽑지 못했다.



이후 쿤사는 여러 사업을 하고 미얀마 정부의 감시하에 있었지만 막대한 재력을 이용해 미얀마에서 편한 여생을 보냈다.[7]



2007년 암으로 사망했고 그의 자식들이 재산을 물려 받아 미얀마에서 저명한 사업가 가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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