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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3 대구지하철참사

호크준 2022. 5. 5.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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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하철참사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서 발생한 방화 사건.


대한민국의 건축 안전을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바꾸었다면, 대한민국의 철도 안전은 이 사건 이후로 크게 달라지게 된다.

# 대구 지하철 참사를 보도한 연합뉴스의 유일한 1보 기사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라는 말만 봐서는 흔하디 흔한 단순 화재같아 보이지만...[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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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철도 관련으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기록한 사고로, 192명이 사망했다. 502명이 사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326명이 사망한 남영호 침몰사고, 304명이 사망[10]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다음으로 많다. 이것은 191명이 사망한 대연각호텔 화재보다 많다. 1995년에 289명이 사망한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벌어진 바쿠 지하철 화재 사망자 다음으로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지하철 화재 희생자를 낳은 불미스런 비극이자 216명이 살해당한 이집트 항공 990편 추락사고 다음으로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살인사건이다.

2. 사건 발생[편집]

뇌졸중으로 인한 반신불수와 심한 우울증을 앓던 김대한(당시 56세)이 자신의 신변을 비관하다 자살을 하기 위해 9시 30분 경, 대구광역시 달서구 송현동에 있는 송현역에서 1079열차 지하철에 올라탔다.

한국어 위키백과, 당시 현장 검증 기사.

9시 53분 경, 그는 성내동 중앙로역에서 열차가 서행하자 미리 들고 있던 석유 플라스틱 통에 불을 붙였다. 불이 그의 옷에 옮겨붙자 놀란 김씨는 휘발유통을 바닥에 던졌고, 결국 수 초만에 큰 불이 발생하였다.

다행히 당시 1079열차는 중앙로역에 정차 중이었고 많은 승객들이 열려 있던 출입문을 통해 대피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1079열차에서는 비교적 큰 피해가 나지 않았다. 또한 1079열차에 타고 있던 승객이 119로 신고를 했다.

2.1. 사건 진행[편집]

9시 30분: 방화범 김대한이 방화를 목적으로 인근 주유소에 방문하여 휘발유 7,500원어치(4~5L) 상당을 구입한 뒤 1호선 송현역 안심방면 승강장에서 안심행 1079열차에 탑승했다.[11]

9시 52분 32초: 안심행 1079열차가 중앙로역에 도착하였다.

9시 53분: 김대한이 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는 순간 휘발유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자신의 옷에 불이 붙자 놀란 김대한은 휘발유 통을 전동차의 바닥에 던졌고, 수 초만에 전동차가 불길에 휩싸였다. 그 불에서 나온 검은 연기, 유독성 가스가 승강장과 지하 1~2층 대합실에 급속히 확산됐고, 승객들이 주출입구 쪽의 계단을 통해 대피하기 시작하였다.[12] 1079열차 기관사는 소화기로 초기 화재 진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화재발생 사실을 종합사령실에 보고하지 않은 채 대피했다. 종합사령실 기계설비사령 주컴퓨터에 중앙로역 화재경보 문구가 뜨고 경보음이 울렸으나, 종합사령실에서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9시 53분 35초 ~ 9시 54분 40초: "1079열차에 타고 있던 40대 남성에 의해 전동차 안에서 화재가 발생되었다"는 내용을 최초로 대구소방안전본부 종합사령실에 신고하였고, 이후 역사 밖으로 탈출한 일부 승객들, 전동차 안에 갇힌 승객들과 휴대전화 통화를 한 가족 등이 현장의 상황을 소방본부 종합상황실에 신고하였으며, 소방본부 종합상황실에서는 8개 소방 파출소[13]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삼덕소방파출소 등 중부소방서 및 북부소방서 휘하의 8개 소방대가 출동했다.

9시 55분 ~ 9시 55분 30초: 중앙로역 역무원이 종합사령실에 "중앙로역 실제 화재입니다. 전혀 앞이 분간이 안 됩니다. 신고 좀 부탁드립니다."라며 급히 보고했으나, 종합사령실이 119에 신고하지 않았다. 한편 1080열차가 대구역에서 중앙로역으로 출발하여 종합사령실에서 전체 열차에 "중앙로역 진입 시 조심하여 운전해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라고 알렸다. 중앙로역 역무원이 초기 소화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부 직원이 승객 대피를 유도하였다.

9시 55분 36초: 종합사령실 운전사령이 전체 열차에 "중앙로역 진입 시 조심하여 운전하여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화재가 발생했습니다."라고 열차무선 전체 호출을 통하여 통보하였다.[14]

9시 56분 45초: 대곡행 1080열차가 이미 검은 연기가 가득 차 있던 중앙로역 승강장에 도착하여 출입문이 자동으로 열렸으며, 승강장에 있던 연기가 전동차 안으로 밀려들자 기관사가 즉시 출입문을 닫았다.

9시 57분 07초: 전동차의 전원이 끊어지며 이에 따라 전동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9시 57분 32초: 1080열차 기관사가 운전사령에게 열차무선을 통해 "엉망입니다. 빠른 조치 바랍니다."라며 적절한 지시를 내려주도록 요구하였다. 운전사령은 상황판단을 하지 못한 채 "대기하고 승객들에게 안내 방송하라"고 지시하여 1080열차 기관사는 "잠시 후 출발할 것이니 기다려 달라"고 안내방송을 하였다. 그리고 곧 중부소방서 서문로 소방파출소 소방대원이 현장에 도착하여 인명구조를 신속히 시작하였다.

9시 57분 40초: 중앙로역 역무원이 화재 사실을 119에 신고하였다.

9시 58분 28초: 1080열차 기관사가 종합사령실에 연락하여 승객 대피 여부를 결정하여 줄 것을 요구하던 중 전동차에 잠시 전력이 공급되어 출발시도를 하였으나, 1080열차에 전력이 공급되어 기관사가 출발을 시도하면 전력이 다시 끊기는 일이 수차례 반복되면서 승객대피 여부를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1080열차 기관사는 전동차가 곧 출발할 예정이므로 전동차 안에 대기하도록 승객들에게 방송을 하였다. 이때쯤 1079열차에서 1080열차로 불이 옮겨 붙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사이 종합사령실과 1080열차간 열차무선 통화가 두절되었다.

10시 2분 48초: 종합사령실에서 1080열차에 전력이 공급되지 않고 중앙로역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알고 1080열차 기관사에게 "승객들을 승강장 위로 대피시키라"고 지시하였으며, 1080열차 기관사는 출입문을 개방하고 승객대피 안내방송을 실시하였으나, 일부 차량에서는 문이 열리지 않았고 승객들이 수동으로 출입문을 여는 방법을 몰라 전동차 안에 갇혀 있게 되었다. 이때 소방파출소 및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구조 활동을 시작하였다.

10시 4분: 소방본부 종합상황실에서 복현 소방파출소 등 16개 소방 파출소, 달서소방서, 동부소방서 등에 구급차와 물탱크차 출동을 요청하였으며[15], 지하 1층과 지하 2층 대합실에서 인명구조를 계속 실시하였다.

10시 10분: 1080열차 기관사는 운전사령의 "전동차 판 내리고 차 죽이고 가라"는 지시를 받고 승객들의 안전과 대피를 확인하지 않은 채 전동차의 주간제어기 키(마스터 키)[16]를 뽑아 역사의 출입구를 통해 탈출하였다.[17]

10시 12분: 소방본부 종합사령실에서 대구시내 병원 구급차 동원을 요청한다.

10시 17분: 종합사령실에서는 다른 전동차의 운행을 통제하면서 모든 전동차의 운행을 정지시켰고, 중앙로역 역무원들은 탈출 후 모두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중부소방서장이 자체 비상소집 명령을 내렸다.

10시 25분: 소방본부장이 경북소방본부에 구조대 및 구급대 지원 요청을 하였다.

10시 28분: 종합사령실에서 전 전동차 운행중지 및 승객하차를 지시하였다.

10시 52분: 소방본부장이 소방본부 전 직원 비상 소집을 명령하였다.[18]

11시 11분: 경북소방본부 6개 대의 구급차 12대가 지원 출동하였다.

오후 1시 38분: 화재가 완전히 진압되었으며, 살아남은 승객들은 밖에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2.2. 사건 규모 확대[편집]

1079열차 기관사는 화재발생 이후 초기 진화에 실패하자 중앙사령실에 통보하지 않은 채 대피했고, 결국 이로 인한 지하철 사령실의 오판으로 9시 55분에 원래 역을 무정차 통과해야 했던[19] 1080열차가 중앙로역 반대편 선로에 정차했다.

게다가 중앙사령실에서 119에 신고를 늦게 했고,[20] 1080열차 기관사가 출입문을 열어주었지만, 이후 마스터 콘트롤 키를 뽑고 탈출하였다. 기관사가 일부러 마스터키를 뽑고 탈출한 것이 아니고 사령실의 지시였다. #[21] 1080열차 기관사는 역사내 연기로 인해 1079열차에 불이 붙은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지하철은 가연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배웠기에(불량 내장재로 인해 화재가 커졌다) 이렇게 심각한 화재였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고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였기에, 1080열차 기관사는 사후 안전 관리 문제로 금고 5년형을 선고받았다.

사건 확대의 원인으로는 다음 내용들이 꼽힌다.

마스터키가 뽑히는 바람에 출입문이 자동으로 닫혔다.[22]

당시에는 비상시 문을 수동으로 열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갇힌 사람들이 많았다. 지하철 문은 보통 문 옆 의자 아래나 벽면에 있는 뚜껑을 열고 그 안의 레버를 당기면 손으로 열 수 있는데, 사고 전에 이 방법이 시민들에게 홍보가 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레버 위치와 사용법에 대해서 아주 조그맣게 써놨기 때문에 관계자나 철덕, 지하철 타면서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 아니면 알기 힘들었다.[23] 당시에는 비상레버 사용법이 지금처럼 전동차 문짝과 의자 옆면에 크게 적혀있지 않았고 레버 주변에만 작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2003년 당시에 국내에서 운용되던 전동차들은 공압식 문으로[24], 밸브 코크가 모두 의자 밑에 위치해 있어서 진짜로 방법을 아는 사람 아니면은 문 여는 비상코크가 어디있는지 아는 사람도 드물었고 이 비상코크의 존재 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아서 공기가 모두 빠지기 전까지 몇 초 정도의 대피 지연이 불가피했다. 대피 지연으로 인해 열차 안에서 호흡곤란에 빠진 승객들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참사 이후 이런 심각한 문제가 지적 받으면서, 이후엔 개방 레버가 출입문 바로 옆으로 옮겨지고 전자식 도어의 보급이 확산됐다. 하도 홍보를 많이 해서 이제는 지하철 문과 스크린도어를 수동으로 열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방화 셔터가 일찍 닫히면서 나오려던 사람들도 나오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화재가 난 1079열차에 비해 훨씬 많은 인명피해가 1080열차에서 발생하였다. 물론 방화 셔터에는 화재가 발생한 쪽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닫히는 경우를 대비해 문이 하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자주 이용하는 역이든 아니든 평소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 아니라면 찾기 힘들다. 찾는다 해도 좁은 문으로 다수가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화재 당시 중앙로역은 연기가 발생하여 시야가 극도로 차단되어 있는 데다가 단전 상태였기 때문에 전등까지 모두 나가[25] 문 손잡이를 찾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 손전등 기능이 많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당시엔 그런 기능이 없었고, 피처폰의 저열한 화면 밝기로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구지하철공사의 거듭된 인력 감축 때문에 안전요원이 없었고, 역사 상주 직원이 4~5명뿐이었으며 안전 교육을 제대로 이수받지 못했다. 때문에 신속한 대피안내가 불가능했다.


다행히도 탈출 방법을 알고 있던 사람이 몇몇 객차에 타고 있었기에, 그나마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예컨대 많은 인명피해가 난 1080열차의 경우 4호 객차에 타고 있던 승객 중에는 당시 철도청 공무원이었던 권춘섭(당시 금호역 역장)이 사태를 직감하고 비상 코크를 취급하여 출입문을 수동개방하였다. #

2.3. 결과[편집]

결국 사건이 일어난지 약 3시간 이후인 오후 1시 38분경에 화재는 진압이 되었지만, 사망 198명[26], 부상 151명이라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났다.

이 참사의 여파로 약 8개월간 중앙로역뿐만 아니라 명덕역부터 신천역까지 6개 역의 영업이 중단되었으며, 전 구간이 영업을 재개할 때까지 1년이 조금 못 되는 시간이 걸렸다. 이 때문에 약 1~2년 동안 대구 지하철의 이용객은 반 이상 감소했다. 또한 중앙로역 구조물 안전문제가 제기되어, 중앙네거리 국채보상로 교차점을 제외한 중앙대로 대구역 - 반월당 구간[27]이 전면 통제됐다. 이로 인해 시내버스들은 계산오거리 혹은 봉산육거리로 우회 운행했으며, 402번같은 경우는 아예 북성로 구간을 포기하고 한때 한일극장으로 다녔다.



또한 이 사고로 전동차는 완전히 불에 타 고철만 남았고 중앙로역 천장과 벽에 설치된 환풍기, 철길 바깥쪽 지붕들도 모두 불에 녹아내려 역 구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사고 뒤 공개된 차량 내부는 시꺼먼 재와 고철만 남아있어 사고 당시의 참상을 잘 대변한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직접적인 화상보다는 유독가스에 의한 기도화상으로 사망했다고 추정되지만, 그렇다 해도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유해들은 형체도 못 알아볼 만큼 처참한 상태였다.[28] 심지어 뼛가루조차 못 찾아 들고 있던 지팡이 하나만으로 사망이 인정되기도 했다.



3. 피해가 컸던 원인[편집]

부실한 사회 안전망과 저급 전동차
대중교통수단인 전철의 객차가 화재에 매우 취약한 가연성 재질인 폴리우레탄 폼 재질의 시트, FRP 소재로 구성된 내장재, 폴리염화비닐 재질로 된 내부 통로 자바레 및 바닥재로 구성되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특히 시트가 빠른 속도로 불에 타면서 치명적인 유독가스를 발생시켰다. 거기다 당시 열차차량에 대한 소방안전대책은 전무한 실정이었다. 고작 소화기 비치가 전부였고 객차의 경우 건축법, 소방법 및 전기사업법 등 각종 규제나 안전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된 사건임에도 처벌할 법적 근거가 없어 기관사와 종합사령실 관계자 몇 명 정도만 과실과 직무유기로 처벌되는 수준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또한 1993년 대구지하철공사에서 매입한 전동차량의 단가는 1량 당 5억 원 수준이었다. 그나마도 낙찰 이후 예산부족을 이유로 대금을 더 삭감하였다. 이는 전동차를 부실한 재질로 제작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선진국에 수출하는 전동차의 단가는 약 17억, 서울 및 부산, 인천 도시철도의 단가는 약 8억이었던 것에 비해 무척 싼 가격이었다.

열차 내장재 문제는 이 사고가 업계에 준 가장 크고 뼈아픈 교훈이었던 만큼, 당시 개통을 목전에 두고 있던 광주 도시철도 1호선과 가장 먼저 내장재 개조에 착수한 인천 도시철도 1호선을 필두로 전국의 모든 도시철도 및 광역철도들이 내장재를 불연재로 교체했다.

열차 내 안전교육의 미비
지금 우리가 지하철을 탈 때 거의 BGM처럼 듣는 "전동차 상단에 출입문 비상취급장치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라는 방송도 이 사고 이전에는 없었다. 참사 당시에 비상시 대응 매뉴얼이 홍보 및 숙지되어 있지 않았던 것은 참사의 규모를 키운 큰 원인으로 지적받았고, 열차 내장재와 마찬가지로 소 잃고 외양간을 고쳐 지금의 철저한 차내안전교육에 이른다.

휘발유를 함부로 판매하는 안전 불감증
사건이 발생하기 전, 김대한은 방화를 목적으로 주유소를 방문하여 자동차 세척용 샴푸통 용량 4리터의 흰색 플라스틱 통에 휘발유를 구입해 갔다. 한편, 주유소 측에서는 정확한 사용목적을 확인하지 않은 채 인화성과 폭발 위험이 높은 휘발유를 적절하지 않은 용기에 담아 판매함으로써 사건이 일어나는 데 한 몫을 한 셈이었다. 석유관계법에 따르면 자동차용 휘발유는 절대로 변형된 방법으로 임의의 용기에 판매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적발될 경우 해당 주유소에 강력한 행정 처분이 내려지게 된다. 그렇지만 기름보관용 플라스틱통에는 휘발유는 20리터까지, 경유는 30리터까지 구매&운반이 가능하다.

4. 사고 이후 조치[편집]

사고 다음날 정부는 대구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고, 당월 25일 대구광역시 당국은 윤진태 대구광역시지하철공사 사장을 해임시키면서도 그 다음날 시청 공무원, 지하철 종사자, 대민지원 온 육군 병력들을 동원해 현장 및 월배차량기지로 실려온 사고 열차들을 물청소하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해 유족들과 주변인들을 기겁하게 만들고 분노케 하였다. 이에 실종자 가족들도 사건 현장을 인간 띠로 둘러싸기도 했고, 안심차량기지 쓰레기 더미까지 뒤져 유해 14구의 일부와 유류품 146개를 수거했다. 한편 대구시는 이 논란에 대해 "물청소 안 했다"던가, "청소는 유가족이 동의했다"라고 둘러대듯 해명했지만, 전부 거짓이었다.

이에 여론은 조해녕 시장의 퇴진을 요구했으나, 그의 소속 정당이자 자성론을 내세우던 한나라당은 이를 '마타도어(흑색선전)'로 일축했고, 지역 유력 일간지 매일신문도 칼럼 <잃어버린 8년>을 통해 대구 유니버시아드까지 들먹이며 참사 책임소재 및 구조적 문제 규명을 '진보적 시각'이라고 보며 철 지난 색깔론을 주장했으며, 매일신문 사장 정재완 신부(니꼴라오)까지 유가족 농성에 대해 "미국 같았으면 총 맞아 죽었다"고 비난 발언을 하여 물의를 빚었다.

또한 방화범 및 기관사, 종합사령실 직원 등 지하철 관련자 8명이 구속, 기소되었다. 게다가 이 당시 비상시 메뉴얼조차 장식밖에 안되었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었고 이에 대해 각자 책임질 건 책임져야 했다. 하지만 참사에 직접적인 이들만 처벌됐을 뿐, 안전에 취약한 역사를 건축하고 인력을 감축시킨[29] 시 당국 및 대구지하철공사는 처벌을 비껴갔다. 참사 당시 중앙로역 통신근무자 등 현장근무자 7명이 숨졌음에도 말이다. 그나마 윤진태 대구지하철공사 사장이 시설 청소로 인한 증거인멸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2004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위와 같은 이유로 대구지하철노조는 지하철 시설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역사상 첫 파업을 벌여 안전요원 확충, 전동차 내장재 교체, 안전방재시설 확충 등 특별단체교섭을 달성해냈다. 그러나 당시 언론의 반응은 부정적이었고, 검찰은 해당 파업이 노조의 본래 목적과 무관했다며 이원준 노조위원장을 붙잡아 형사처벌했다. 2004~2005년에도 2호선 인력감축이 안전에 역행한다 하여 2차례 파업을 전개했다가 이후 조합원 13명이 해고되었다. 다행히 2014~2015년에 8명이 복직됐지만 4명은 아직 복직되지 못하고 있고, 나머지 1명은 2012년에 이미 폐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동시에 부산, 인천지하철노조도 지하철 안전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자 서울지하철이고 부산지하철이고 인천지하철이고 할 것 없이 부랴부랴 차량과 시스템을 뜯어 고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당시 굴러다니던 차량들은 유독성 가스의 원인으로 지목된 가연재 시트를 전부 뜯어내고 알루미늄 시트로 바꾸었으며 그 이후로 제작하는 신형 차량들의 경우에는 난연재가 사용된 시트가 채택되었다. 서울도시철도공사의 경우 나중에 난연재 모켓 시트를 알루미늄 시트 위에 덧붙였다.[30] 참고로 이 당시에는 이미 한국의 전동차 제작사가 불연재로 제작된 차량을 외국으로 수출하던 상황이었다. 한국 철도회사들은 고작 원가 절감을 이유로 불에 잘 타는 내장재를 사용했던 것이다. 사실 객차 내장재는 불연재를 사용하는 것이 참사 이전부터 원칙이었으나, 이걸 지키는 국내 철도회사는 상술했듯이 단 한 곳도 없었다. 이는 불연재 교체 시에도 나타난 문제인데, 푹신하고 앉기 편한 난연재/불연재 소재도 있는 반면 딱딱한 시트나 아예 쇠로 된 불편하지만 가격이 싼 소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전국 지하철 내의 '테마열차' 투입이 거의 없어졌다. 이전만 해도 지하철에서는 가끔 특수하게 책을 끼워서 이동하는 도서관 열차나 불교 연등 장식을 한 봉축열차를 운행한다거나 하여튼 별의별 신기한 한정 열차를 굴렸었지만, 이 사건 이후로 이쪽도 불에 취약하다는 분석이 나온 탓인지 사건이 일어난 뒤 한동안 테마열차 운행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세월이 지나면서 경의중앙선의 도서관 열차와 같이 테마열차가 재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건 이전만큼은 못하다. 주로 외관이나 내부에 간단히 스티커만 붙이는 정도다. 대구 도시철도 3호선의 경우 연말연시마다 새해 이벤트 열차를 운영하는데 여기에 헬륨풍선과 천장 장식물 등 온통 불에타면 유독가스를 내기 딱 좋은 것들로 꾸며놨다가 공사 홈페이지 고객의 소리에 정신 못차렸냐며 민원이 올라오는 바람에 2021년부터 랩핑만 하는 등 규모가 축소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광고 래핑 소재가 가연재인 경우가 있다. 개인업체에서 광고열차 계약을 맺는 경우 업체 주관에 따라 해당 열차에 대한 광고물 랩핑 소재부터 형태까지 결정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서울교통공사 등의 지하철 운영 주체의 확인이 없는 상태에서 원가 절감을 위해서 가연재 랩핑을 사용하는 것이다. 관련영상 래핑 소재가 가연재라도 나머지 부분은 불연재기 때문에 불이 번지지는 않겠지만, 래핑 부분이 타면서 유독가스가 발생하기 때문에 시민들이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역사 내에 인공암반 소재를 사용한 모든 도시철도역((예) 구 충무로역)의 인공암반을 철거 리모델링 하는 데 간접적인 영향력이 컸다. 인공암반이 화재 시 유해물질을 발생 시킨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고 울퉁불퉁한 구조로 인해 연기 때문에 시야가 가려진 상태에서 우왕좌왕하며 머리를 부딪혀 2차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두번째 이유이다.

유사 상황을 가정한 대피훈련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객실 내, 역사 내 안내 방송과 안내 영상으로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매우 체계적이고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승객들의 인식 수준도 높아졌고 출입문 수동 개폐 요령이나 소화기 사용 방법 등에 대해서도 전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

이전에 매우 작게 안내되어 있던 비상시 문 개방 방법도 크게 문이나 문 바로 옆 좌석 위에 붙게 되었다. 서울지하철에서는 운행 시간 중 일부를 할애하여 특정 역에 지하철을 멈추고 타고 있던 승객들에게 수동 개방 방법을 시연하고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하기도 했다.[31] 이후 설치되는 스크린도어에도 비상 개방 레버를 크고 눈에 띄기 쉬운 색으로 만들고 비상시 사용할 수 있음을 알리는 문구를 붙였고 화재를 대비해 방독면과 산소통, 손전등이 다수 비치되었다. 화재시 비상 탈출 경로 안내문도 추가로 역마다 부착되었다. 플랫폼의 영상장비에는 역에 비상 정차했을 때나 터널에서 비상 정차했을 때 탈출하는 방법 영상을 주기적으로 상영해주고 있다.

한편, 참사가 발생한 대구지하철은 역내 안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승객들이 승강장의 안전선 밖으로 넘어가거나 안전펜스에 손을 대는 행위를 엄금하고 있다. 그런 상황이 발생할 경우 승강장을 순찰 중이던 사회복무요원이 즉각 제지한다. 사회복무요원이 없을 경우 역무실에서 방송을 통해 제지한다. 그러나 작정하고 사고를 일으키는 사람[32]은 즉시 제지할 수 없기 때문에 승강장과 선로를 물리적으로 차단하는 스크린도어 확충이 필요하다. 2017년 현재 대구 도시철도의 전 역사에 모두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었다.[33]

지하역사의 스크린도어의 경우 우리나라의 역사들이 건설된 것이 스크린도어가 도입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제연(除燃)설비가 승강장 상부에서 공기를 공급하고, 하단의 선로 쪽에 공기를 빨아들이고 외부로 배출하는 방식[34]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스크린도어를 설치하게 되면 연기를 승강장과 선로로 분리, 격리는 가능하게 되지만 승강장에서는 외부 공기를 공급하기만 하고 발생하는 연기를 역사 외부로 배출하는 일이 불가능하게 된다. 또 반대로 선로에서는 공기를 그냥 빨아들이기만하는데, 흔히 생각하기에는 공기를 외부로 빨아당기면 끝인거 아닌가 싶지만 그렇게 되면 공기의 압이 낮아져서 연기가 외부로 빨려가는 양이 적어지므로 비효율적이며, 정상적인 제연설비는 효율성을 위해 외부공기를 공급하고, 연기를 배출하는 2개가 한 세트로 병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일부 역사의 스크린도어의 경우 상단부가 완전히 밀폐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35] 이 점이 사쿠라기초 사고를 겪은 일본이 스크린도어를 적극적으로 설치하지 않거나, 설치하더라도 난간형 형태만 고집하는 이유라고들 한다.[36]

이 점을 감안했는지 대구지하철의 스크린도어 내부(열차측) 비상개폐 레버는 어두워진 상태에서도 식별이 쉽도록 형광색으로 되어있고 비상 개방 방법에 대한 표지가 A4 반절 수준으로 일반 종이 형태로 손잡이 옆에 작게 붙어있는 서울교통공사 등지와 달리 상당히 눈에 잘 띄고 형광색으로 비교적 크게 붙어있다.

그리고 화재 발생시 역사 내가 정전으로 앞이 안보인 점을 감안하여 출구 계단마다 축광(야광) 유도 표지판을 붙여 놓아서 화재와 같은 비상시 정전으로 모든 등이 소등 된 상태에서도 쉽게 탈출할 수 있게 하였다.

5. 관련 이야기[편집]

  자세한 내용은 대구 지하철 참사/관련 이야기 문서



 참고하십시오.

6. 사고의 후유증[편집]

살아남은 사람들도 가스 노출에 의한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하며 살아야 한다. 가스 자체의 유독 성분도 문제지만 고열의 가스로 인해 피부와 호흡기에 상당한 화상을 입었다고 한다. 전신화상도 살아남아도 고생이다. 그리고 설사 몸에 아무런 이상 없이 무사히 빠져나온 사람들이라 해도 후일담을 다룬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목숨이 왔다갔다 했던 당시의 충격 때문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고생하고 있다. 2003년 3월 21일 다큐 '병원 24시' 영상

그렇기에 사고 희생자들과 그에 관계된 유족들은 현재까지도 이 사고를 잊지 못하고 있으며, 생존자들은 대부분 사고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충격으로 자살하거나 정신 이상이 발생한 사람, 우울증으로 사망에 이른 사람 등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당사자들이 아닌 대구 시민들 중에서도 지금도 특히 대구 중앙로역을 포함해서 지하철을 기피하는 사람들도 있다.

7. 여담[편집]

이 사고 이후 대구광역시에서는 사고일인 매년 2월 18일에 추모 행사를 하고 있는데, 2022년 현재는 19주년이 되었다. 9주년인 2012년에는 한겨레21에서 특집으로 생존자들의 증언과 이후의 삶을 기사화했다.("우리는 생존자가 아니다") 반면 추모사업은 국민성금으로 조성된 특별위로금 운영과 유족회 출연기금 등을 두고 유족들이 갈등하는 등 한동안 난항을 겪다가 2016년 '218안전문화재단'이 세워졌다.

사건 이후 전 국민이 발벗고 나서서 참사 희생자들과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금을 수없이 보냈으며, 인터넷에서는 전년도에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 마크를 이 사건에서도 추모의 의미로 많이 사용했으며,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의 노란 리본처럼 그 당시에도 추모의 의미로 많은 시민들이 '근조'(謹弔)라고 새겨진 검은 리본을 달았다.

대구지하철 사고 유족 중 한 명은 2017년 다음 스토리펀딩 <재난참사 없는 대한민국을 꿈꿉니다>(이후 책 <재난을 묻다>로 출판)에서 해당 사고에 대해 '인간사회는 서로간 신뢰가 중요하다'고 전제하며 국민들을 속게 하는 행정 및 정치가 계속되는 한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뼈 아픈 교훈을 전했다.

사건 당시 대구를 연고로 하고 있던 대구 동양 오리온스 농구단은 19일 창원 LG 세이커스와의 홈 경기가 있었다. 사건 이후 대구광역시는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고, 5일동안 시민애도기간을 정한 상태였다. 이에 동양은 몰수패를 각오하고 경기를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팬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경기를 진행했으며, 대신 치어리더 등의 응원 없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경기를 치렀다. 결과는 74:82로 LG의 승리. 이 후 동양은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 잃어버린 15초 사건으로 인해 통합 우승은 놓치게 된다.

이 후 K리그의 안양 LG 치타스 서포터들이 대구 FC와의 경기를 앞두고 게시판에 '불전동차' 라는 지역 비하 발언을 하면서 네티즌의 항의가 폭주하며 안양 레드 치타스 홈페이지가 마비되자 한국프로축구연맹 홈페이지와 대구·안양시청 홈페이지, 안양LG 축구 치타스홈페이지 등 인터넷 게시판까지 항의와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서포터즈 측이 사과문을 올렸다.

사고 발생 3년 후인 2006년에는 반월당역에서 서문시장역으로 운행중이던 대구 지하철 2호선 열차에서 화재 경보기가 오작동 되었던가 하면#, 반고개역을 출발한 전동차가 터널 안에서 멈춘 뒤 갑자기 전동차 내의 조명이 모두 꺼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고#, 동대구역을 폭파해버리겠다는 신고가 접수돼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며#, 수성구청역 지하 2층의 환기실에서 짧은 시간동안 많은 연기가 발생해 승객들이 대피하고 소방차까지 출동하는 일이 빚어지는 등# 대구 지하철 참사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대구 시민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사고들이 유난히 많이 발생했다. 대구 이외의 지역에서도 2006년 상반기에 총 3건의 화재 사고가 발생하였으며 이중 부산 지하철 경성대·부경대역과 서울 지하철 인덕원역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는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 하기도 했다. ##

당시 뉴스를 보면, 사고가 난 후 다른 사람들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지하철 창문을 깨고 나가거나 선로를 따라 인근 역으로 가서 나간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쪽은 거의 모두 부상 하나 없이 무사히 탈출했다.[37] 사고가 일어난 이후 시간이 흐른 지금은 화재 흔적 같은 것은 이미 사라진 상태지만[38], 사고 당시부터 2년 6개월을 넘는 시간 동안 해당 역 근방의 지하도 전체에 굉장한 어떻다고 표현하기 힘든 냄새가 흘러넘쳤으며, 그와 함께 통행인의 수는 매우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도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어 보이는 일들이 있다고 추정된다. 귀신을 봤다는 이야기 같은 것은 당연하고, 지하도는 상당한 시간 동안 스산한 분위기에 유동 인구마저 상당히 줄어드는 등 여러 가지로 참사의 흔적이 이어졌다.

피의자 김대한은 당시 화상을 입어 달아나던 중 북구 노원동3가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범죄 사실이 드러나 검거, 구속되었다. 그는 마치 정신 이상처럼 굴려는 듯 진술이 뒤죽박죽이었으며, 정신이상자가 저지른 사고라는 기사가 나오면서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편견을 부채질하는 거 아닌가 우려도 나왔지만 정신과 의사들의 판단에 의하면 정신이상은 아니라고 했다. 또한 심신장애도 없었다고 한다. 결국 1심에서 현존전차방화치사죄 등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항소하였으나 2심에서도 항소를 기각,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그러나 상고는 포기하고 교도소 안에서도 횡설수설했다고 한다. 그리고 진주교도소로 이감됐다가, 2004년 8월 30일 지병인 호흡 곤란과 뇌졸중으로 급사했다.

김대한은 2001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른쪽 상반신, 하반신 모두 장애가 와서 지적장애 2급[39] 판정을 받았다. 김대한의 방화 사유는 심한 우울증 후 정신 질환이 심해진 데 따른 판단력 상실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한의 아들은 대구중부경찰서에 출두하여 '아버지가 심한 우울증을 앓았으며 남의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등 정신적으로 심한 문제가 있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지병인 뇌졸중으로 인한 울분을 방화로 토한 사건이라는 분석도 있어 방화 사유에 대한 의견은 아직도 분분하다. 김대한의 직계 가족은 사건 이후 곧 경북 지역을 떠났다. 친척들도 이쪽 집안은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한다고.

대구 지역 일간지 매일신문에선 사고 10주기에 즈음하여 3편의 특집 기사를 실었다. <상> 아물지 않는 유가족 고통 <중> 후유증 시달리는 부상자들 <하> 부상자 처우 및 향후 대책

2013년 2월 15일, 김범일 前 대구광역시장은 참사 10주기를 앞두고 대시민 담화문을 발표하여 위로의 말을 전한 뒤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안전한 도시를 만들 것을 약속했다. #

참사 10주기가 되는 날인 2013년 2월 18일, 대구 각지에선 추모 행사가 열렸다. # #




참사 12주기 추모벽이 중앙로 역 지하 2층에 마련되었다고 한다. 국민성금 5억 2,000만원을 들여 길이 27m, 폭 3m, 340㎡ 넓이로 조성되었으며, 추모 공간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추모벽과 사건 당시 불에 그을린 벽과 그리고 화재의 열기에 수화기가 녹아내린 공중전화, 당시에 있었던 매점, 혈압측정기, 지하철 사물함, ATM기와 희생자의 유류품 등도 전시하고 있다.

이 사고로 인해 PTSD라는 질병이 양지에서 공론화되었다. 물론 5.18 민주화운동이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처럼 PTSD 환자가 많이 발생한 사건사고는 많았지만, 정신건강의학과(당시 신경정신과) 상담 자체가 터부시되고 의지드립이 난무하던 분위기상, 피해자는 상처를 숨겨야 했다. 하지만 이 사고로 인해 PTSD에 대한 관심도가 급증하여 후대의 참사 처리에 있어 PTSD 치료는 외적 부상 치료 이후에 반드시 행해지는 치료로 자리잡았다.

2014년 8월에 대구광역시의 한 취객이 문재인 당시 의원을 죽이러 간다고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가 검거되는 사건이 있었다. 문재인 의원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위해선 열심히 뛰면서 정작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을 때에는 신경쓰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사실 문재인 대통령은 대구 지하철 참사가 벌어졌을 당시에도 유족들을 비밀리에 도왔음이 유족 중 한 명인 박성찬 씨에 의해 알려졌다. 기사 1 기사 2

이 사건으로 금고 5년형을 받은 기관사는 2008년 출소 후, 설령 그 때로 돌아간들 다시는 전동차에 오르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기사

이 사건 이후로 강화된 지하철 역사내 인화물질 반입통제가 시행됐다. 이때문에 2018년 2월 이런 사건도 있었다. TBC 뉴스 장면.

불에 타 전소된 전동차 12량 중 9량은 고철로 판매하였으며, 1량은 2007년에 대구안전테마파크에 안전 교육용으로 조성되었고, 나머지 2량은 활용방안을 찾지 못해 현재까지 대구 안심차량기지에 천막에 씌워진 채 방치되어 있다.[40]

매년 2월 18일 사고 발생시간에 중앙로역으로 도착한 전동차는 추모의 의미로 5초간 경적을 울린다.

2022년 2월 19일 대구 FC 홈개막전에서 팬들은 대구 지하철 참사를 추모하는 내용의 걸개를 내걸었다.#

8. 대중매체에서[편집]

2007년 감우성, 최강희 주연의 옴니버스 영화 <내 사랑>에서는 대구 지하철 참사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사고 장면이 나온다.

홍승우의 비빔툰에도 이와 관련된 8행시를 그리는 에피소드가 연재되었는데 단행본으로는 5권에 실려있다.

윤인완이 스토리를 쓰고 김지혁, 유현, 변병준, 최경아, 서문다미, NANO, 요요 등이 작화를 맡은 단편집 문화 컨텐츠의 이해 (2010) 2부 "동화" (작화: 변병준) 편은 최면 치료를 받고 당시의 기억을 지워버린 대구 지하철 참사 피해자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작품을 통해 실제 사건을 컨텐츠화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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