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꼬꼬무3 518 민주화운동

호크준 2022. 5. 1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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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슈피겔지의 사진.



1. 개요[편집]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깃발 없는 진압군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탱크들의 행진 소릴 들었소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오....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 위의 저격수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릴 들었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여기 망월동 언덕배기의 노여움으로 말하네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 같은 주검과 훈장
누이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오....

- 정태춘, '5.18'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본인이 알기로는 우리 학생들과 시민들은 과도정부의 중대발표와 또 자제하고 관망하라는 말을 듣고 학생들은 17일부터 학업에, 시민들은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당국에서는 17일 야간에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일부 학생과 민주인사, 정치인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구실로 불법 연행했습니다. 이에 우리 시민 모두는 의아해 했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당국의 불법처사를 규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계엄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를 대량 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 젊은이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였으니! 아! 설마, 설마! 설마 했던 일들이 벌어졌으니, 우리의 부모형제들이 무참히 대검에 찔리고, 귀를 잘리고, 연약한 아녀자들이 젖가슴을 잘리우고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무자비하고도 잔인한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너무나 경악스런 또 하나의 사실은 20일 밤부터 계엄당국은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장을 지키고 우리 부모형제를 지키고자 손에 손에 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계속 불순배, 폭도로 몰고 있습니다.

잔인무도한 만행을 일삼았던 계엄군이 폭돕니까? 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돕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국에서는 계속 허위날조, 유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시민군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또한 협상이 올바른 방향대로 진행되면 우리는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

- 광주 시민군, 1980년 5월 25일 <광주시민군 궐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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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광주 일원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하여 군부 등에 의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와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다수의 희생자와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이다.[26]

2. 설명[편집]

알쓸범잡 2 - 5.18 민주화운동

5·18 민주화운동, 또는 광주 민주화운동은 넓게 보면 1979년 12·12 군사반란 직후부터, 좁게 보면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두환 등 신군부 쿠데타세력이 내란하고 폭동을 저질르고 이에 저항한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처음에는 신군부에 의해 광주 폭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점차 시대가 변하고 진실이 밝혀지면서 현재는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주항쟁, 광주학살 등으로 부르며, 보통 일어난 날짜를 줄여서 5·18로 부르기도 한다. 대한민국 초·중·고 교과서에서는 대부분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적고 있다.

지만원을 위시한 극우파에서는 전두환의 주장을 답습하여 무장 폭동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대한민국 대법원에서는 여러 차례 그러한 주장에 근거가 없음을 재확인했고, 정당한 저항권 행사로 여겨진다. 헌법재판소는 저항권 행사에 대해서 통합진보당 위헌정당해산 사건에서 "개별 헌법조항에 대한 단순한 위반이 아닌 민주적 기본질서라는 전체적 질서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있거나 이를 파괴하려는 시도가 있어야 하고, 이미 유효한 구제수단이 남아 있지 않아야"하며 그 경우에도 "민주적 기본질서의 유지, 회복"을 목표로 해야만 정당성을 지닌다고 판시했는데(2013헌다1) 1980년 광주의 사례가 이에 적확하게 들어맞는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설령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위법성이 조각된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군부가 군부를 장악하였고,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자 반란군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일으킨다.

12·12 군사반란이 만든 계엄령과 대학교들의 겨울방학, 연말이라는 점이 맞물려 이에 대한 대처는 뒤늦게 나타났으며, 대학들이 개학을 맞이한 3월 이후 안개정국에 대한 사항이 알려졌고,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끊이지 않았으며,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전라남도 광주시[27]에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계엄군은 시위를 진압하려고 폭동적 시위진압을 고수, 무고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성폭력 등의 성범죄를 저질렀으며, 불법처형을 하고 민간인을 향해 총기까지 사용하면서 광주를 대대적으로 탄압했고, 더이상 참을 수 없던 시민들이 시민군을 조직, 대항했지만 신군부에 의해 철저히 진압당했다. 군사정권의 인권 탄압과 민간인 살해 사례로서 많이 알려진다. 이 정도로 설명하기에는 당시 상황과 이후 여파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이 일련의 사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의 일부로서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희생으로 의의가 다시 떠올랐다.

3. 원인 및 책임 소지[편집]

흔히 극우를 중심으로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의 대통령이 전두환이 아니라 최규하라는 이유로 전두환과 하나회가 아닌 최규하 대통령에게로 책임을 돌리곤 하는데, 이는 12·12 군사반란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등으로 하나회와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힘을 얻었음을 간과했거나, 일부러 무시하는 주장이다.

광주 학살의 1차 책임은 계엄군이 아닌 최종 결정권자이자 명령권자인 전두환과 군정에게 있다. 계엄군에게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시민 학살을 지시한 장본인이 범한 죄를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 당시 지휘계통상 책임자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 겸직), 진종채 제2군사령관, 전라남북도 계엄분소장, 그리고 예하 부대 지휘관들로 되어 있으나, SBS가 2018년 보도한 미 국무부 비밀전문에 따르면 최종 진압작전을 결심한 책임자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다.[28] 문부식 등 자유주의자들은 해당 만행을 '국가주의'라는 반 이성적 광기에서 기인했다고도 해석했다.[29] 신군부 역시 국가 권력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국가'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외출.외박 없이 겨울부터 시작된 「충정훈련」에 대한 부대원의 반발이 과잉진압을 불렀습니다. 특히 「철없는 대학생들 때문에 우리만 고생한다」는 분위기가 퍼져나갔지요.』
『영외거주자인 고참 하사관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그 불만이 밑으로 전달됐습니다. 나가면 데모하는 대학생놈들 가만두지 않겠다는 적개심밖에 없었습니다.』〈趙씨〉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광주에 갔었다는 이유로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鄭씨〉

- 중앙일보 <광주로 간 군인들> 4.충정훈련과 과잉진압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특전사 대원들과 31사단 부대원들, 항공작전사령부 헬기 조종사와 무장 운용사수들, 20사단(현 11사단 예하 결전여단) 출신 예비역 장병들에게도 당시 사건은 지우고 싶은 암울한 기억이다. 이들은 그 당시 시대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상부에게서 빨갱이를 때려잡으러 간다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이를 수행하였으며, 진압 당시 학생과 시민들을 진압하다 점점 폭력 수위가 올라 같은 나라 국민을 상대로 총구를 겨누는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을 다수 겪었다. 진압 작전에 참가한 계엄군들은 "빨갱이에게서 나라를 지켰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지만, 이윽고 진실이 하나둘씩 밝혀지면서 이는 국민을 무차별로 살해한 학살자라는 불명예로 돌아왔다. 실제로 당시 계엄군의 상당수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등 다양한 정신 문제를 겪고 심지어 죄책감과 괴로움에 밖으로조차 쉽사리 나서지 못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괴로운 노후를 보내는 이들, 심지어는 한때 5.18 진압작전에 참가한 이들의 지인들의 증언에는 옳지 못한 전두환의 폭동적 무력 군사진압 명령을 따른 것 하나로 온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결국 젊은 나이에 쓸쓸히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안타까운 이들도 상당히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결국 계엄군과 시민 양측 모두에게 심각한 상처로만 남은 사건인 것이다.

3.1. 계엄군과 신군부의 폭동[편집]

  관련 문서: 5.18 민주화운동/학살

모든 계엄군이 일괄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볼 수는 없으나, 여러 증언과 자료를 종합하면 당시 계엄군의 만행은 심각한 수준에 달했다. 이는 어느 정도는 반공주의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부합한 결과로 볼 수 있으며, 어느 정도는 자기합리화와 PTSD[30][31], 집단광기의 사례로 볼 수도 있다. 다음은 당시의 계엄군의 만행에 대한 자료들이다. 국제인권감시단 아시아 지역 담당 지부에서는 계엄군을 나치돌격대에 비유하기도 했다.

회사원 조정석 씨(35·당시 대학 1년)는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광주공원 근처를 걷던 조 씨는 착검한 M16 자동 소총을 든 공수대원 2명으로부터 ‘이유 없는 추격’을 받았다. 필사적으로 도망친 그가 겨우 몸을 숨긴 곳은 남의 집 창고 속 연탄더미 뒤였다. 거기까지 쫓아와 연탄더미를 칼로 일일이 찔러보던 공수대원은 퇴각 명령을 듣고서야 아까운 사냥감 하나 놓쳤다고 말하며 철수했다. 광주에서 그 정도는 얘깃거리조차 못 된다. 유언비어라는 이름으로 떠도는 학살극만 해도 부지기수다. 그러고도 공수부대가 앵무새처럼 되뇌는 소리는 자위권 발동이라는 ‘공자님 말씀’이다.

- 5·18 주범만큼 무거운 ‘하수인’의 죄 - ‘피의 광주’ 하급 지휘관·사병도 책임…목격자들 “그들은 인간 사냥꾼”

(중략) 다음은 그날 그가 광주계엄군으로 자신이 겪은 경험을 이야기 해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내가 광주에 투입되기 전 상관들은 광주에서 반정부 반란군이 도시를 점령하며 시위를 하고 있고 그들은 모두 '빨갱이'나 좌경분자들이라고 했다. 신문이나 뉴스를 볼 수 없는 우리들은 상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그런 '빨갱이들'에 대해서 자연히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광주에 투입된 우리들은 총에 대검을 끼고 실탄을 넣었다. 비록 상관의 명령이었지만 나는 그 대검으로 '빨갱이'들을 찌르고 군중을 향해 사격을 했다. 잡혀온 '빨갱이'들은 개처럼 두들겨 패고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겼다. 진압봉과 개머리판 그리고 군화발로 온 몸이 시커멓게 피멍이 들도록 때렸다.
처음에는 길가에 서 있던 시민들이 우리 군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항의하는 사람들도 몇 몇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이 실제 사람을 패서 죽이고, 총으로 쏴서 죽이고, 대검으로 찔러서 죽이는 것을 몇 번 보는 순간부터는 감히 항의하는 시민도 없었다. 서로 눈치만 보며 우리를 무서워하며 그저 바라만 보았다.
잡혀 온 수백 명의 남녀노소 '빨갱이'들은 넓은 공터에서 우리들에게 사정없이 맞고 짓밟혔다. 그들은 우리들이 시키는 대로 시궁창을 기었다. 오리걸음으로 선착순을 반복했고, 그중에서 늦은 '빨갱이'들은 군홧발과 진압봉으로 죽도록 맞았다.
나는 광주시내 여기저기서 죽어 넘어져 있는 시신도 여럿 보았다. 어떤 군인들은 "전라도xx들은 다 죽여야 해"라고 떠들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감히 빨갱이들이 대한민국에서 활개치고 다녀" 하며 잡혀온 민간인들에게 심한 분노와 증오를 품었다.
한 번은 밤에 어디서인지 모르는 방향에서 갑자기 날아오는 돌에 맞아 전우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도 했다. 이 일로 '빨갱이'들에 대한 우리들의 분노와 적개심은 더욱 커갔다. 그 후 우리 손에 잡히는 '빨갱이'들을 더욱 무자비하게 죽였다. 사방에서 터지는 총성과 최루탄가스 연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리는 고함, 비명, 절규들은 생지옥을 연상하게 했다.
우리들은 물이 없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면도도 하지 못했고, 그럴수록 이런 상황을 초래한 '빨갱이'들에게 극심한 분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전우 중에는 지난 밤 몇 놈을 대검으로 통쾌하게 찔렀노라고 자랑삼아 말하던 이도 있었다."
- 그 형은 광주의 계엄군이었다, [기고] 누가 진정 광주의 가해자였는가
- 김성수 <함석헌 평전> 저자

88년 국회 광주청문회등을 통해 양심선언한 일부 공수부대원들은 동료들의 협박 등으로 시달리고 있다.
『89년 1월 청문회에서 양심선언한 뒤 같은 동료들이 죽이겠다고 협박전화를 걸고 집에도 찾아와 행패를 부렸습니다. 한때는 협박 때문에 자살도 시도했습니다. 뒤를 이어 양심선언하겠다는 동기생이 있었지만 제가 협박당하는 모습을 보고 그만뒀습니다.』〈7공수 33대대 최영신(崔永信.41.중사) 씨〉
(중략)
〈「광주로 간 군인들」이 연재되는 동안 독자뿐만 아니라 당시 광주에 있었던 공수부대원들부터 수많은 전화가 걸려왔다.
증언자 상당수는『네가 그런 소리 했느냐』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중앙일보, <광주로간군인들>6.끝.아물지 않는 후유증


계엄군들은 시위와 전혀 상관없는 지나가던 일반 시민들까지 진압봉으로 두들겨 패고 대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쏴 죽인 것은 물론 부상당한 시민들을 불법으로 처형하고 물놀이하던 아이들까지 쏴 죽였으며, 헬기 사격과 강간[32]등을 자행하기도 했다.

2000년 5월 19일 MBC 스페셜 (충정작전, 그후 20년) 방송 내용에 따르면 특전동지회 회원들이 7공수여단 출신 최영신이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의 진실을 증언하자 오히려 그에게 협박은 물론 테러까지 가한[33]사례가 있었다. # 게다가 1989년 3월 9일에는 KBS가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제작한 프로그램 '광주는 말한다'에 대해 항의 농성을 벌이며 "여기가 대한민국이냐, 북한이냐? 너희는 빨갱이 방송국이다"라고 비난하며, 같은 연도에는 특전동지회 회원 2명이 ‘어머니의 노래’를 만든 김윤형 프로듀서 등 3명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도 했다. # 이런 사건을 저지르고도 1998년 뉴스 인터뷰에서는 피해자 행세를 했으며,#[34] 게다가 몇년 뒤에 영화 화려한 휴가가 개봉했을 때 또 한 번 '화려한 휴가'가 거짓이라고 주장하며 ''거짓으로 국민과 군 간에 적대감을 조성한 것 같이 이번 기자간담회에서 국민과 특전사를 이간질 및 적대감을 고취시키는 그 저의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밝혀라" 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

양심선언을 한 최영신 씨는 "주남마을 양민 학살을 증언한 것이 내가 제일 잘 한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치료를 받았으면 지금도 살아있었을 것이다. (상관이 부대원들에게)'처단해라' 이야기 했고 조금 이따가 총성이 들렸다. 소나무에 핏자국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저항할 수 없는 중상을 입은 사람들을 사살하라고 한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당시 거기 있던 계엄군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총을 직접 쏜 군인은 사망한 상태였다. 처리하라고 명령한 장교는 포도밭을 운영하며 귀농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38년 전 일 때문에 찾아왔다"는 제작진에게 "나도 피해자다. 군인은 피해자 없냐. 죽지만 않았을 뿐이다. 군인이 장교로 진급 못 하면 피해자지. (계급장) 하나만 더 달았어도 내가 이렇게 고생 안한다. 그때 연금만 탔어도"라고 하소연했다. 이어 "내가 무슨 사람을 죽이라고 하나. 헬기 요청을 했는데 헬기가 끝났다. 우린 철수해야 한다. 헬기도 없고 철수하는데 못하니까 '난 못하니까 데려가라' 그런 거다. 주머니에서 실탄이 나왔다. 그건 분명히 폭도다. 우리가 북한하고 전쟁 붙었다. 그럼 총으로 쏴야 하냐, 맞아 죽어야 하는거냐. 선의의 피해자가 있을 수 있지만 할 수 없다. 이해해야 한다. 38년 됐으면 끝났지 않냐. 6.25도 다 캐고 다니는 거냐. 나도 피해자다"고 말했다.

고 김부열 씨가 어디서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시신사진을 보면 그는 얼굴이 없다. 법의학자들은 "목은 부패에 의해 없어진 게 아니다. 누군가가 얼굴 부위를 강제로 훼손했을 거다", "목은 사후 분해로 보여진다. 생전에는 절단할 수 없다. 남아있는 몸에서 사인을 찾지 못한다는 건 없어진 부위에서 사망 원인이 있다는 거다"고 분석했다."

11공수여단 간부였던 김 소령은 "아무것도 없는데 사살 당했다. 선의의 피해자다. 우리는 반은 선의의 피해자다"고 주장했다.

5.18 관련 기무사 내부 문건을 보면 군인 사찰 내용이 나온다. 전역 후에도 기무사는 그들의 언행을 면밀히 파악했다. 혹시라도 양심선언을 하는 이들이 나오지 않도록 감시한 것이다.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양심선언을 한 최영신 중사는 "수없이 협박 받았다. 무서웠다. 오죽하면 가스총을 지니고 다녔다"고 털어놨다. 그는 "내가 양민학살 증언을 할 때 집사람이 임신 중이었다. 그런데 서로 피해다녔다"고 밝혔다.

양심선언 후 사찰당한 5.18 당시 계엄군 간부는 기무사가 작성한 문건을 보고 "기가 막힌다. 나를 완전 범죄자로 만들었구만. 무서운 사람들이다. 아주 생사람 잡는다. 쓴 내용도 안 맞다"고 말했다.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현장도 목격한 그는 "보니까 집중사격을 했더라. 김 장군이 보더니 "이놈들 확실히 처리했네?"라고 했다." 확인사살까지 했다는 뜻이다"고 말했다.

김 장군은 전직 국방부 장관이다. 그는 "버스에 가지 않았다. 학살하고 죽였다는건 처음 듣는다. 그 사람들이 다 무고한 사람들인지 데모대에서 총질한 사람인지 어떻게 아냐. 나는 양심을 가책을 받는 게 없다. 국민의 군대로서 주어진 소임을 다 한 것이다"고 입장을 밝혔다.
- 그것이 알고 싶다 - 잔혹한 충성 제2부 '학살을 조작하라' (#)

최씨는 양심선언 후 "홀가분했고,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또 자신의 양심선언 후 관련자들의 고백이 이어질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국방부는 최씨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반박했고, 그는 같이 군생활을 한 일부 동료들에게도 배신자로 여겨졌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가 그 때 양심선언 한 것에 대해 잘했다는 동료들이 절반, 싫어하는 동료들이 절반이에요. 경조사 자리에서 만나도 광주 이야기는 금기 사항이죠. 어느 날은 술을 마시고 후배가 ‘도대체 왜 그랬냐’고 묻기도 했죠."
단죄 못한 5·18 계엄군 범죄 - ‘5ㆍ18 김 소령 악행’ 알린 최영신씨 “계엄군 양심고백 이어질 줄 알았는데…”


5.18 진압 후 웃는 계엄군…38년 만에 동영상 공개 2018년 5월 10일에는 5.18 38주년을 앞두고 황영시를 비봇한 신군부의 지휘관들이 활짝 웃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공개되었다.

4. 의의[편집]

  자세한 내용은 5.18 민주화운동/의의 문서



 참고하십시오.

5. 항쟁 주체의 성향과 이념[편집]

근본적으로 5·18 광주 항쟁의 성향은 대한민국 헌법에 대항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헌법에 충실했는데 그것은 반공주의에 근거한 우익 자유민주주의 사상이었다.[35]

이제 총을 든 시민들은 맨손으로 시위를 하고 항의하는 보통 사람인 '민중'이 아니라 '무장한 시민' 이른바 '시민군'이라는 새로운 양태의 '무장세력'으로 전환했다. 이는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시민 무장투쟁을 의미하는 것이고...(후략)[36]

김영택, 5월 18일 광주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 2010, 역사공간, 379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전개된 광주항쟁의 이데올로기가 한국전쟁 이후 지배 이데올로기로 확립된 자유민주주의였으며, 그것도 반공주의를 전제하는 자유민주주의였다는 점은 여러 자료에서도 드러난다.」

김정한,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 소명출판, 2013 , 81쪽

항쟁의 참여자들의 주요 이데올로기였던 자유민주주의는 오랜 냉전 체제의 산물인 반공주의를 전제하고 있었다.

김정한, 2013, 83

도청에 간첩 여부를 조사하는 조사과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운동 주체들이 적극적으로 반공주의를 견지했음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자신들의 운동이 용공으로 몰릴 것을 우려한 전략적 대응이었다고 해석하기에는 반공주의에 따른 실제 실천 행위들이 너무 적극적이었고 일상적이었다.

김정한, 2013, 86

이에 관해 대표적인 사례는 가두방송을 담당했던 전춘심(전옥주, 당시 31)의 경험일 것이다. 5월 22일 그녀는 간첩으로 몰렸다가 풀려나기도 한다. (...) 그리고 결국 5월 26일에는 시민을 가장한 수사관들이 전춘심을 향해 "저 여자는 교육을 받고 온 간첩이다"라고 소리치자 몰려든 시민들에게 붙잡혀 보안대로 끌려간다. 수사관들이 이런 방식으로 주요 활동가들을 체포하거나 대중들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히 시민들의 반공주의가 진지하고 강력했음을 반증한다.

김정한, 2013, 86~87

5월 21일에도 기자를 자칭하며 촬영하는 민간인에게 누군가 "저 자식 간첩이다"라고 소리치자 시위대열의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즉석에서 공수부대에 인계한 사례가 있었다. (...) 이와 관련해 최영태는 "간첩이라고 하면 모두가 경계를 하고, 심지어는 대치하고 있는 시위대와 공수 사이에도 잠시 휴전을 하고 간첩 협의자를 인수인계할 만큼 시위대들의 반공의식은 강했다"고 평가한다.

김정한, 2013, 87

22일 오후 3시쯤, 20일 밤의 주인공이었던 전옥주와 차명숙이 용달차를 타고 도청광장에 나타났다. 이들은 19일 밤 이후 꼬박 3일 밤 새우며 방송을 하고 다니느라 목소리가 쉰 듯 했고 매우 지쳐 보였다. 두 사람이 용달차를 타고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는 도청광장으로 오자마자 학생들이 두 사람을 붙잡았다. 둘의 방송연설이 수준급이어서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듯한 데다 내용도 사실과 다른 과장된 내용이 많아 오히려 시민들이 당황하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20일 밤의 시위가 그토록 확산된 것으로 두 사람의 선동적 방송연설에 그 연유가 있는 것으로 판단한 항쟁주체 측은 그녀들이 혹시 북에서 보낸 공작요원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둘은 도청광장에서 붙잡혀 일단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후 6시쯤 지프차에 실려 군 수사기관에 넘겨졌다. 이같은 전옥주 차명숙의 검거를 놓고 일부는 정보요원이 두 사람을 검거하기 위한 방법으로 학생이나 시민으로 위장해 들어왔다는 주장과 순수한 학생들이 군 수사기관에 의뢰해 진짜 간첩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신상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어 넘겼다는 2가지 설이 제기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후자일 것으로 보고 있었다. 둘은 지프차에 태우고 화정동,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경계선에서 군 수사기관에 넘겨줬던 사람은 광주시 주택과 공무원 이무길이었다.[37] 물론 그녀는 북의 공작원이 아님이 수사당국에 의해 밝혀졌다.」

김영택, 2010, 426~428

광주항쟁은 신군부가 몰아붙인 것처럼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 갈등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거부하고 군부독재를 달성하려는 정치군인들과의 갈등이라는 데서 해방 후 일어났던 일련의 좌익 봉기와 엄연히 구별된다.

김영택, 2010, 693


5.18 광주민주항쟁을 순수하다거나 무이념, 혹은 정치적 성향이 없는 것처럼 표현되기도 하는데, 그럴 수 있는 건 그 성향이 대한민국 체제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5.18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기본으로 아는 거지만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점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을 몰라서 생기는 사례로 생기는 것이 대표적으로 5.18 민주화운동/왜곡/북한 개입설과 5.18 민주화운동/왜곡/무장폭동설이다.

5.18은 사회적 맥락에서 국가에 반대하려고 일어난 게 아니라, 전두환이 내란으로 집권하는 과정에서 전두환 내란세력을 상대로 맞서 싸운 항쟁이었다. 논리적으로 보면 항쟁의 성향이 당시 대한민국 지배사상과 다를 이유가 없고 실제로 5.18 항쟁은 그랬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지배사상인 자유민주주의 사상에 반하는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과 하나회야말로 국가에 해를 끼치는 반란 세력이다.

실제로 5.18 사진을 검색하면 수많은 태극기가 나오며, 증언을 조사해 보면 수많은 애국가가 나온다. 그것 말고도 증언을 보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도 나오는데 이런 노래와 이념은 박정희가 10월 유신 때도 내세운 이념이기도 하니 그다지 대항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5.18 항쟁 당시 항쟁 주체들의 "애국"[38]심과 "우익"성은 복잡하게 조사할 필요도 없이 김영택 박사의 『5월 18일 광주: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읽기도 어렵지 않으니 5.18 공부 입문으로도 적합하다. 강경보수 언론인 조갑제도 "김일성은 오판 말라", "북괴는 오판 말라"는 시민들의 구호를 근거로 광주 민주화운동은 반공 민주화운동이라고 증언했다.2005년 증언 2007년 증언 2013년 증언

6. 전개[편집]

  자세한 내용은 5.18 민주화운동/전개 문서



 참고하십시오.

7. 사건의 영향[편집]

5.18 광주민주항쟁은 한미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것 때문에 로널드 레이건이 전두환에게 거부감을 보이거나 한미 관계에 영향을 끼쳤을 정도였고, 이런 미국의 태도는 김대중의 석방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정상회담 교섭의 실무를 맡았던 손장래 전 주미공사는 4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해 당시 비공개 접촉을 회고하며 "미국 측은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어떻게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손에서 피가 흐르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느냐'며 정상회담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정상회담 교섭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그는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명 문제를 에둘러 언급했고 당시 앨런 보좌관이 이를 레이건 전 대통령에게 귀띔해 비공개 접촉 1달 만에 정상회담이 성사됐다고 설명했다. 이 정상회담을 계기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감형을 받고 1982년 석방됐다.

"김대중 살려주면 전두환 美 국빈방문 허용 '韓·美 정상회담' 거래 있었다"


이후로도 로널드 레이건에게 전두환의 이미지는 좋아지지 않은 듯, 알츠하이머로 인해 전두환을 기억해내지 못하자 참모들이 간신히 설명해주는데 이때 한 말이 "아, '학생들은 죄다 공산당(빨갱이)'이라고 했던 그 친구!"였다. 레이건 역시 매카시즘으로도 비판받았던 대통령인데, 그런 레이건에게조차 전두환은 얼토당토 않는 소리하는 인간으로 기억됐던 것.

대한민국의 소위 86세대가 반미주의로 돌아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이전까지 운동권은 미국에 매우 호의적이었는데, 도덕주의를 앞세운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가 박정희 군사정권과 노골적으로 날을 세우면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5.18 당시에는 고유가 등으로 지미 카터 정권의 지지율이 크게 하락하면서 근 반세기 미국 민주당 최초로 연임이 좌절될 사태 앞에 놓이게 되자 적극개입을 꺼렸다.

특히 미국 제7함대 소속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5.18 당시 부산에 입항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소식이 알려지자 광주에 갇힌 시민들은 미국이 민주주의를 응원하고자 항공모함을 파견했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코럴시호는 단지 계엄군이 시민군과 대치하는 사이에 북한군이 남침하지 않을까 우려해서 E3A 공중 조기경보통제기를 경계 작전에 투입하기 위해 파견된것 뿐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는 직접 피해를 입은 광주시민들은 물론, 나중에 5.18 민주화운동을 해외언론이 보도한 내용을 반입하여 비디오로 돌려보면서 파악한 운동권 대학생들에게 큰 충격과 배반감을 안겼다.33년 전 오늘 리포트9 - "미국을 믿었는데..." 이는 곧 미국이 광주에서의 학살을 알면서도 막지않고 묵인했거나, 심지어 적극적으로 승인했다는 음모론으로 커져나갔는데, 특히 당시 미국 사령관의 작전권하에 있던 20사단이 광주로 왔다는 사실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믿어졌다. 이 음모론은 이후에 재판과정에서 외교부 문서가 일부공개되면서 상당부분 사실이었던 것으로 들어났다."미국이 5.18 무력진압 용인했다"..미 국무부 비밀문건 첫 확인 이후로 1982년 3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1985년 5월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등을 시작으로 적극적으로 미국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들로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광주광역시에서는 지금도 미국에 대한 원망이 유족들을 중심으로 여전히 남아있는 중이다.

또한 당시 국민들의 인식에도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실제로 5.18 민주화운동은 5.16 군사정변과 달리 전두환의 정통성에 심각한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심지어는 5.16 군사정변 당사자조차 내란 세력이 저지른 짓이라고 인식할 정도였다.

김종필, 김재춘, 김계원, 장세동 씨 등 10여 명이 둘러앉았다. 전두환 씨는 불참.
국회가 화제가 되고 얘기는 80년 광주 문제로 옮아갔다.
장세동(전두환 정권의 국가안전기획부장 경호실장) 씨가 광주 사태는 진주민란이나 홍경래의 난 같은 것이라는 취지로 80년 5월의 광주 상황을 설명해갔다. 그러자 김재춘 씨(3代 정보부장)가 무뚝뚝하고 직선적인 성격 그대로 "무슨 그따위 얘기를 아직도 하고 있는 거요.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보로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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