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꼬꼬무3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호크준 2022. 7. 27. 08:23
728x90
반응형

 


북한 인민무력성 정찰국 소속 상어급 잠수함이 강원도 강릉시 동해안 일대에 침투하여 정찰 공작 활동을 벌이고 복귀를 시도하던 중 해상 복귀가 불가능해지자 육로를 통한 복귀를 위해 상륙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문제의 잠수함은 1996년 9월 14일 오전5시 부대가 있는 함경남도 락원군에서 정찰국장의 환송을 받으며 출발했다. 휴전선 경계 5마일 정도까지는 별 문제 없었고 이 지점부터 수중 공기관과 잠망경을 내린채 해저 60~70m 깊이로 침투했다. 또 강릉에서 5마일 정도 떨어진 거리에선 잠수함을 부상시켜 잠망경으로 위치를 확인하며 접근했다. 15일엔 해안 3~400m 거리에서 잠수함을 바닥에 가라앉혀 정찰조를 상륙시켰고 이후 물속에서 대기하다 17일 정찰조를 태우기 위해 들어가던 중 그만 좌초했다.

이광수는 "대부분 잠수정이 후진하다 암초에 걸린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앞으로 들어 왔으나 파도가 너무 쳐서 옆으로 밀리면서 암초에 걸렸고 프로펠러가 망가지면서 좌초한 것”이라고 말했다.#

반응형


하지만 정찰만 하고 임무 마쳐서 모두 복귀하려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후에 침투 목표가 대통령 암살이라는 것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저격조만 상륙하고 승조원과 잠수함은 복귀하려다 실패하자 전원 상륙하였다. 안기부 조사에서 이광수는 10월 7일 김영삼 대통령이 춘천에서 개막된 전국체전 개막식에 참석할 경우 저격할 목적이었음을 진술했다고 한다. 정부는 무장 공비 침투 목적을 사실대로 공개할 경우 국내 경제가 위축되고 북한과의 대화 창구가 완전 폐쇄될 가능성이 있어 한동안 보류했다고 한다. #

원래 계획은 1996년 10월 춘천에서 전국체전이 개최된다는 첩보를 입수한 북한이 강릉에 저격조만 상륙시키고 승조원은 복귀하려고 했으며 저격조는 민간인으로 변장한 뒤 낚시 가방에 불법복제판 M16 소총을 넣고 낚시 동호회인 것처럼 행세하면서[15] 강릉에서 춘천까지 도보로 이동한 후 이 전국체전 개막식에서 연설을 하기로 예정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을 저격하려 했다. 하지만 이들이 탑승한 잠수함이 강릉 앞바다에서 좌초함으로 인해 복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진 승조원들도 덩달아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결국 인적이 드문 곳에서 저격조가 승조원 중 저격조 역할이 불가능한 인원을 정리했다. 일례로 만일춘 중좌, 정영구 중좌[16], 류림 소좌, 원흥천 대위, 박태홍 대위 이 5명은 원래는 승조원이지만 저격조 역할도 가능했기 때문에 정리(처형)되지 않고 저격조로 역할이 전환되었다.

1996년 9월 18일,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해상에서 68사단 초병과 택시기사 이진규[17]가 50m 해상에서 좌초한 북한 잠수함을 발견하면서 무장공비소탕작전이 시작되었고, 11월 5일 인제군 연화동에서 특전사 장선용 상사가 마지막으로 잔존한 정찰조 2명을 사살함으로써 작전을 최종 종결시킬 때까지 총 49일간 이어졌다.

침투 무장공비는 총 26명이라는 설과 25명이라는 설이 분분했으나 북한에서 발표한 선전물에 전사자로 분류된 것이 확인되어 26명이 맞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중 총 13명이 국군에 의해 사살됐고, 11명이 함께 침투한 공비에 의해 처형됐으며, 1명(이광수)이 생포됐다. 그리고 1명은 위에 서술되어 있듯이 행방은 커녕 존재 자체도 불확실하지만 일단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군 피해는 전사 11명(장교2/부사관2/병7), 아군의 오인 사격으로 전사 1명(68사단 홍동진 대위), 부상 27명에 민간인 4명, 경찰 1명 사망, 예비군 사망 1명.[18]북한 무장공비의 내륙 침투,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2. 침투 과정[편집]
attachment/강릉 무장...
좌초된 상어급 잠수함[19]

침투한 무장공비는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직속 정찰조 3명과 정찰국 해상처의 안내조 및 전투공작원(무장공비), 그리고 잠수함 승조원 등 총 26명으로, 상어급 잠수함으로 침투하였다. 이들 중 가장 핵심적인 대남침투요원은 정찰조원들로서, 잠수함 기간요원들은 물론이고 안내조를 비롯한 전투공비들은 작전을 시작한지 빠른 시간내에 진압이 되었지만[20] 정작 제일 중요한 정찰조원 3명 중에서 초기에 사살당한 1명을 제외한 나머지 2명은 한 달 반 동안이나 잡히지 않았으며, 우리 측 전사자들은 주로 이들에 의해서 발생했다.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카메라에서 해당 지역의 군단 사령부나 비행장 그리고 도로 같은 주요시설을 촬영한 사진이 나온 점으로 볼 때, 이들의 목적이 앞으로의 전쟁을 위하여 한국군의 군사시설들과 지리 따위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임을 알 수 있었다.

대한민국 해군의 연안함대는 최신예 호위함인 인천급 호위함, 대구급 호위함들이 나오기 전이였던 2010년까지만 해도 대잠능력이 취약해 제7기동전단 및 잠수함사령부 그리고 미합중국 해군의 지원이 불가피하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파동과 함께 허약한 한국 해군력의 현 주소가 드러난 충격적인 사건으로 이 사건 이후 포항급 초계함과 울산급 호위함이 주력(둘 다 대잠능력이 전무하다)인 해군의 현실이 도마에 올랐고, 이후 KDX사업이 추진되고 잠수함 건조도 이루어져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 세종대왕급 구축함, 손원일급 잠수함 등의 첨단전력을 확보하고 강화되어 이제는 해군력만으로도 해안경계가 커버되고 육군은 보조 역할로 바뀌었다. 다만 포항급 초계함과 참수리급 고속정이 더 많은 연안함대들은 그래도 부족한 대잠전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이어지게 되고만다.[21]

이 사건을 통해 아군의 평소 해안 경계태세 및 대남도발 상황발생시 초동조치 등에 취약한 문제점이 많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것은 무엇보다 적에 대한 좌초된 잠수함을 최초로 발견한 후 보고가 지휘 체계대로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아[22] 아군의 대응이 늦어지는 바람에 조속한 포위망 구축 후 무장공비들을 조기에 소탕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 일을 키우게 만든 가장 근본적인 실수였다. 그리고 전면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령 계급의 장교[23]가 전사한 것도 대간첩작전치고는 큰 손실이었다. 조기 포위망 구축과 소탕에 실패하여 작전기간과 범위가 확대되는 바람에 임업과 관광업이 주 산업이었던 강원도 지역민들의 생계 활동이 위축되어서 이로 인해 강원도민들이 입은 정신적 그리고 경제적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24]

간첩이 침투하던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96년 9월 14일 5시, 해당 잠수함은 침투 작전을 위하여 함남 퇴조항을 출항 공해로 우회 이동하였다.
9월 15일 1시, 대포동 해안가에 도착하여 잠수함을 해저 정박하였다.
같은 날 21시, 안내조 2명과 함께 인민무력부 소속 정찰조 3명이 침투 상륙하였고, 안내조는 다시 잠수함으로 복귀했으며, 정찰조는 군 비행장 및 레이더 기지, 항만, 화력발전소를 정찰/촬영하였다.
9월 16일 21시, 잠수함은 사전 침투한 정찰조의 복귀를 위해 대포동 해안가에 다시 침투하여 연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공해상 해저에서 대기하였다.
9월 17일 23시, 재연결을 시도하다가 좌초되었으며,[25] 함장의 명령으로 보안 물품과 서류 등을 파기한 뒤, 그들은 강릉 안인진리 해안에 상륙하였다.
9월 18일 1시 30분, 잠수함 폭파/자침을 시도 이후, 공작원들과 승조원들이 잠수함에서 이탈, 상륙함으로써 사건은 시작되었다. 잠수함은 근처 68사단 해안 경계 초소에 의해 관측되어 선보고되었다. 이후 택시기사 이진규 씨와 경찰에 의해서도 발견신고가 접수되었다. 그러나 신고에 대한 불신으로 인하여 진위여부 확인에 많은 시간이 소모되는 바람에 상부로의 보고와 대응판단이 늦어졌고, 이는 초동조치 지연으로 이어져서 이 사건의 치명적인 단초가 된 조기 포위망 구축에 실패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후 연대장과 사단 정보과장까지 출동하여 현장을 감수한 후에야 적 잠수함이 침투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단 지역과 제1야전군사령부 전 지역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다.
당시 침투 경위에 대해서 언론에서는 아군 해안경계 태세의 문제를 지적, 비판하는데 치중했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택시기사 이진규 씨가 단독으로 좌초 잠수함을 발견하여 신고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68사단 초소에서도 좌초 잠수함을 이미 발견하여 감시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제 만나러 갑니다 505회에서 이 작전에 참가했던 예비역 원사분이 "군에서 잠수함을 미리 발견했지만 발견지점이 소초와 통신이 안되는 지역이라 초병이 도보로 소초까지 걸어가는 것을 이진규 씨가 발견한 것이다"라는 증언을 했다. 다만 무장공비에 의한 잠수함 상륙이라는 근래 초유의 사태[26]를 믿을 수 없어서 신중을 기하느라 현장을 재차 엄밀히 확인하는 과정이 길어지면서 보고와 초동조치가 늦어졌을 뿐이다.[27] 사실 당시에도 해안 초소에서 초동 발견, 보고했다는 발표가 있었지만 언론과 여론은 이를 그냥 군의 면피용 뻥 정도로 여겼다. 워낙 군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던 시절이고, 무엇보다 경찰이 이진규의 신고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으면서 역으로 이진규가 영웅시 되었던 탓이다.
9월 18일 16시 40분, 강릉시 강동면에서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2명이 정찰국 해상처 소속 안내조원인 이광수를 체포하였다. 비슷한 시각인 17시에는 68사단 수색대대에 의해 항공에서 이루어진 수색 및 정찰 중 정찰조에 의해 처형당한 공비의 시신 11구를 발견했다. 사실 명목상으로는 좌초된 책임을 물어 처형한 건데, 군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쓸데없는 인원 제거가 된다. 전투력도 없는 인원 살려둬봤자 식량만 축내고 더군다나 적에게 잡힐 경우 자기네 정보를 제공할 가능성이 있어 위험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타수, 함장, 부함장 등 진짜 좌초에 책임있을만한 인원들은 나중에 전사하거나 생포되었고 좌초와 아무 관계가 있을리 없는 정치지도원 소좌는 여기서 시신이 발견됐다. 결과적으로 전투원이 비전투원을 몰살시킨 것이 된다.
초기에 이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공비들이 사용하다가 놓고 갔을 것으로 생각되는 물품이나 무기가 다수 발견되었다. 이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육로를 택하게 되어 공비들도 매우 당황했음을 알수 있다.
3. 이광수 생포[편집]

▲ 9월 19일, MBC 뉴스데스크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 18명 자살 1명 생포》[28]

9월 18일 16시 30분 경, 거동수상자를 발견했다는 농부 홍성은씨 부부의 신고로 강릉경찰서 강동파출소에서 근무하던 최우영 경장과 전호구 경장이 M1 카빈으로 무장하고 출동한다. 파출소에서 고작 2km 떨어진 거리였다고 한다. 최우영 경장과 전호구 경장이 신고자의 남편인 농장 주인과 대화 중이던 이광수에게 접근하여 M1 카빈을 조준하고 '꼼짝 마,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라고 말하자 이광수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려고 했다. 이때 최우영 경장이 달려들어 이광수의 손을 내리쳐 이광수가 권총을 떨어트리면서 일촉즉발의 순간에 이광수는 제압되었고 이 사건의 유일한 생포자가 되었다.[29]

사건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는 순간으로 이광수가 이 때 체포되어 침투한 무장공비들의 신원과 수를 전부 진술했기에 군 당국은 이를 바탕으로 작전을 할 수 있었다. 이광수의 진술 전까지만 해도 군 당국은 침투 인원의 수를 10여명 남짓으로 생각했다. 만일 이광수의 진술이 없었다면 군 당국은 다른 무장공비들은 어떻게 잡았더라도, 한 달 반 동안이나 포위망 밖에서 종횡무진으로 돌아다녔던 정찰조원들의 정확한 인원을 파악하지 못하여 작전에 어려움이 더 컸었을 수도 있다.[30] 물론 이들은 도주 과정에서 민가에 침입해 식량, 의복 등을 훔치고 맞닥뜨린 사람들을 민간인과 군인을 막론하고 살해하고 다녔기 때문에 이들의 존재는 결국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사건 초기에 침투 인원과 목적 등의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다는 건 그런 정보가 전혀 없는 것에 비해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다.

현재 이광수와 최우영은 서로가 서로의 생명의 은인이라며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고 친하게 지내고 있다.기사 이게 사실인 것이 만일 이광수가 권총을 꺼내는 것을 최우영이 막지 못했다면 전호구에 의해 이광수가 사살되거나, 최악의 경우 이광수가 최우영, 전호구 경장을 모두 사살하고 신고자인 민간인까지 살해한 후 M1 카빈 소총을 탈취하여 달아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 적의 규모를 알 수 없어 작전에 더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고 후자의 경우 이광수 또한 다른 무장공비들처럼 다른 곳에서 군에게 사살되거나 운 좋게 생포되었더라도 경찰과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사실 때문에 남한 사회에 이렇게 잘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고 과정에서 농부 부부의 재치와 용기가 대단했는데, 남편이 이광수에게 다가가서 "송이버섯 따러 오셨냐?"며 동네 주민인 줄 아는 척 하고 친근하게 접근하여 잡담을 하면서 시간을 끄는 사이 부인이 전화로 경찰을 불렀다고 한다.[31] 이광수는 부인이 신고를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외딴 농장에 전화가 있을 리 없다고 판단하고 경찰이 오더라도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남한 집집 마다 전화가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그 집에서 절대로 시간을 끌지 않았을 것이라고.

실제로 1990년대 말 까지도 전화가 없는 경우에 가능한 여러가지 대공신고방안들을 소개하는 교육자료들이 있었고, 대한민국에서 전화가 직접 들어오지 않는 곳이 어지간한 무인도급 벽지에서조차 사라진 것은 00년대에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부터였다. 하지만, 간첩의 예상과는 다르게, 이미 새마을 운동때 촌구석 곳곳까지 전화선이 설치되었고, 설령 집에는 직접 전화선이 들어오지 않는 벽지라도, 근처에 전화 되는 곳 하나 쯤은 있었다.

생포된 이광수는 생포 직후에는 침투 인원이 총 20명이라거나 민방위 훈련을 조사하기 위해 왔다는 등 대놓고 엉터리 진술을 해서 일부러 역정보를 흘려 작전 수립에 혼란을 빚으려고 의도적으로 투항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나중에 밝히길 동료들을 위해 하루만 버티면서 시간을 끌어주면 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그랬다고 한다. 그러나 21일부터 다른 무장공비들에게 투항을 권고하는 방송을 하게 되었으며 적어도 이때부터는 군 당국에 제대로 협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해서 흥미로운 일화가 있는데, 이광수는 조사 중 무엇을 먹고 싶냐는 물음에 "광어회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광어회는 고급 음식으로, 이광수 자신은 잠수기지에서 직접 여름철 해상훈련 도중 산소통, 작살등으로 광어를 잡았기에 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하지만 '못 사는' 남한에 광어회나 있겠느냐는 심정에서 그렇게 대답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광수의 생각과 다르게 당시 남한에서 광어회는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잡은 상태였다. 양식이 80년대부터 시작돼 90년대 들어서는 대량 생산이 가능한 수준까지 발전했기 때문이다. 조사관들은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고, 고급 음식이라 쉽게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과 달리 광어회를 바로 가져다 주자 이광수는 그제서야 조사에 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북한에, 또는 남한 내 고정간첩에게 보내는 암호로 된 탈출 명령 같은 것이 아니겠냐고 입방아를 찧았으나 지나친 상상에서 나온 단순 루머였다.#

이광수는 96년 10월 기자회견에서 '북으로 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남조선에 침투한 죄인으로서 처분대로 하겠다', '정부에서 하라는 대로 하겠다'며 전향의사를 우회적으로 표시했다. 이후 그는 남한 사회에 잘 적응하며 정훈 교관으로 지내고 있다.

2011년 이광수는 안보교육과 전술토론에 참가해 당시 지형지물을 거론하며 침투를 증언했다. 이씨는 북에서 훈련을 받은 곳과 이곳의 차이는 도로에 차가 많이 다니고 불이 환한 것만 빼고는 똑같았다”며 “군 초소가 있지만, 근무를 서지 않는 것까지 알았다. 잠수함 내부를 불태우고 11명만 자살한 것은 탑승 승조원이 11명뿐인 것으로 위장하려던 치밀한 계획이었다”고 설명했다.
4. 공비 추적 및 소탕 과정[편집]
attachment/강릉 무장...
블랙호크 헬기에 탑승하는 특전사 요원들. 평소와는 달리 검정 베레가 아닌 방탄모를 착용하고 있다.



36사단을 비롯한 인근 육군 보병사단과 해당 지역 동원예비군은 물론 최정예 특수전 전력인 특전사 병력도 상당수 투입되었으며, 해군 역시 1함대와 해군작전사령부에서 함정 23척 지원은 물론 지상전력으로 제1해병사단에서 출동한 수색대 및 보병 병력을 동원했으며 해군 특수전전단 병력도 진해 및 동해에서 급파해 동원했다. 공군에서는 18전투비행단과 공군작전사령부에서 항공기 76소티[32] 지원 등이 있었다. 일일 지상작전투입병력 평균 43,000여명, 연인원 총 150만명에 달하는 육/해/공 대규모 작전. 게다가 경찰청도 전투경찰들로 구성된 타격대와 기동대 등을 대거 투입하였고 파출소 근무 경찰관도 기동복 입고 M16 소총을 휴대했다. 이 때 이광수 체포조 등 일부 경찰들이 M1 카빈 소총으로 무장했다는 사실을 안 경찰청에서 급히 경찰 내 K2 소총들을 긁어모아 강원지방경찰청 산하에 급히 뿌려서 교체해 주었고, 본의 아니게 강원청은 전국 지방청들 중 K2 보유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 되었다.

이후 9월 18일~9월 30일에 걸쳐 차단선을 구축하였고, 곧이어 아군에 의해 남은 북측 공비들에 대한 수색 및 섬멸 작전이 전개되었다.
9월 19일 10시 경, 단경골 일대에서 특공연대에 의해 20여분간 교전이 발생했다. 이때 공비 3명 사살되었다.
같은 날 14시 경, 칠성산 일대에서 특전사 3여단 병력이 적 3명과 접촉하였다. 공비들은 투항유도에 불응하였고, 전원 사살되었다. 투항 유도 중 사살에 이르기까지는 여러가지 가설이 존재하나 대체적으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가설과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전사 3여단 모 지역대는 칠성산 9부 능선 일대에서 은신한 3명의 공비를 먼저 발견하여 지근거리까지 포위를 완료하였고, 대대장에게 이에 대해 무전 교신을 한 결과, 지역대장은 공비에 대한 생포/사살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았다. 곧 지역대장이 "자수하라, 옷을 벗으면 살려주겠다."고 외쳤으나 대답이 없었고 공비 중 한 명이 "지역대장 동지 들어오시오"라고 소리쳤다. 이에 지역대장이 "상의를 벗으면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상의를 벗고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열부터 하나까지 숫자를 세기 시작하였는데, 셋까지 세었을 때 누군가 사격을 개시하였고, 이는 지역대원들의 동시 집중사격으로 이어졌다. 공비 3명 사살.
같은 날 16시 경, 오이골 일대에서 X사단 병력과 교전하여 적 1명 사살.
9월 21일 9시 30분, 칠성산 정상에 특전사 X여단 X대대의 제 4중대가 헬기레펠로 투입되어 3인 1개조를 이루어 하향식 수색을 실시하던 중에, 그 중 한 수색조의 선두에 있던 대원이 매복하고 있던 적(정찰조 2명)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방아쇠를 당겼으나 장전이 안된 상태라서 응사가 제한되자 "적이다!"라 외치며 몸을 굴려서 옆에 절벽 아래로 3미터 추락하였으며, 뒤이어 오던 이병희 중사가 즉각 응사하는 순간 적에게 두부관통상[33]을 당했고, 맨 뒤에 있던 세번째 대원이 즉각 엄폐하여 응사를 실시했으나 적은 상호 엄호하며 도주하여 사라졌다. 전과 없음. 아군 이병희 중사 1명 전사.[34]
같은 날 20시 경, X사단 X연대와 예하 수색중대가 매복작전 중 모 아군병사가 어둠 속에서 적과 접촉하여 수하하자[35] 적은 멈칫 하더니 옆의 나무에 엄폐를 하였고 뒤늦게 적임을 인지한 아군 병사의 사격으로 1차 교전 시작. 적의 수류탄 및 단발사격 공격으로 아군 1명 전사, 1명 부상. 이후 자정이 넘은 시점 인근 매복지에서 적의 대화소리[36]에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사격을 가해 2차 교전, 이후 적을 다시 발견하여 3차 교전 결과 적 1명 사살, 아군 2명 부상, 최종적으로 적 1명(대위 김연호) 사살[37]. 총 아군 1명 전사, 3명 부상.[38]
9월 22일 6시 40분 경, 칠성산 일대에서 X사단 X연대가 차단 작전 중, 적을 발견했다. 지근거리까지 유도에 성공했으나, 적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교전을 벌였고 적 1명(중좌 정영구)을 사살했으며[39], 교전 중 적의 뒤를 점하려고 뒤로 돌던 아군을 감지한 적의 응사로 인한 두부 관통상으로 아군 1명(상병 강정영)이 전사했다. [40] 당시 보도
9월 23일 6시 30분 경, 칠성산 일대에서 정상 방향으로 수색작전을 전개하던 중 공비와 조우, 교전 중 아군 2명 중상. 그 중 한명은 이틀 후인 25일 전사(상병 김대영). 같은 시각 민간인 안상영 씨가 송이버섯을 따러 작전구역에 들어왔다가 국군에게 오인사살당한다.
9월 28일 6시 30분 경, 보광리 일대 무명고지에서 X여단 X대대 X 중대 병력이 매복 중 적 1명을 발견하여 생포를 목적으로 유인하였다. 생포하려는 도중에 적이 권총을 뽑으려고 하자 총격을 가해 사살하였다. 이 사람은 부함장 유림 이었다. 적 1명 사살.
9월 29일 20시 경, 고성군 간성읍 진부리에서 매복 중이던 한대성 병장이 무단이탈을 했다가 국군 오인 사격으로 사망하였다. 아군 1명 전사.
9월 30일 16시 경, 목계리 일대에서 공비들을 수색하던 특전사 X여단 X대대 X 중대 병력이 인근 산의 정상에서부터 하향 수색하며 내려오고 있었다. 마을 인근까지 내려와 옥수수밭에 이르자 대원 1명이 옥수수단 속에 손을 집어넣었고 안에 무엇이 있음을 느껴서 옥수수단을 헤치자 은거하고 있던 적이 노출됐다. 순간 대원들은 사격자세를 취하고 투항을 권유했으나 공비가 권총을 빼들자 특전사 대원들이 사격을 실시해서 사살했다.[41] 공비 1명(소위 리철진) 사살.
이 시점까지 육군 특전사, 특공연대, 보병사단 병력과의 교전으로 공비 11명을 사살한다.
한편 북한 정찰조원 3명 중에 생존한 2명은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다.
10월 3일~7일까지 용평 스키장과 월정사 일대를 통과했다.
10월 8일 14시 경, 평창군 탑동리 일대에서 산나물을 채취하기 위해 산을 오르던 민간인 3명을 살해했다.
10월 9일 21시, 오대산 일대에서 아군 매복조와 30여분간 대치 상황을 벌이다 이탈하였다.
10월 12일, X군단 사령부를 촬영 및 감시하였다.
같은 날 20시 40분 경, 연곡면에서 매복작전을 하던 도중 홍동진 대위가 아군 병사 김 모 상병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했다. 오인사격으로 직속상관을 사살한 김 상병은 이후 국군교도소에 중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10월 14일 20시 경, 인제 지역 일대의 민가와 자동차에서 식량 등을 절취해 취식하였다.
10월 16일, 신남에서 인제 방면으로 차량 이동 중이던 학교 교사에 의해 그들이 도로를 따라 가던중 발견되었다. 아군 5분대기조가 출동하나 합동신문조는 그들을 인부나 근처에 살던 주민들로 판단하였고 대공 용의점이 없는 것으로 분석하여 접촉 기회를 상실하였다. 정찰조는 이때 도주로를 바꿔 남쪽으로 도주 후 다시 북상하였다.
10월 20일, 소양호를 수영으로 도하하였다.
10월 22일, 양구와 인제 일대 모 사격장 근처에서 싸리나무를 벌목하던 2사단 표종욱 일병을 살해한 뒤 전투복 등을 절취하였다.
10월 25일, X사단 X연대를 촬영했다.
아군은 이들과 한동안 접촉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나, 마침내 11월 4일 15시 경에 산머리곡산 일대에서 동계작전을 준비 중이던 아군 X사단 X연대 병력에 의해 발견되었다.
참고자료-육군지 제297호
참고자료: 당시 3군단 항공단장 최해필 대령(최종계급 소장)의 회고록 발췌, 아래쪽 1/3 분량이 당시 이야기이다.
11월 5일 4시 20분 경, 인제군 북면 용대리 자연 휴양림 입구에 있는 연화교 매표소 통나무집에서 매복하고 있던 아군 매복조와 교전하여 적군과 아군 각각 한명씩 상흔을 입었다. 특공연대 소속 매복조 2명이 거수자를 확인하고 수하하였으나, 거수자는 수하에 응답하지 않고 "703이냐? 3대대 선임하사다. 몇 대대냐?"라 대답했고, "3대대 선임하사인데 어두우니 나와서 얘기해라."라고 하면서 계속 접근했다. 매복조는 3대대는 이미 부대가 이동을 마친 후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를 이상하게 여겼으나 분명한 확인을 위하여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접근하는 거수자가 방탄모를 착용하지 않았고, M16 소총으로 무장한 것을 보고(703연대는 M16을 사용하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공비라는 것을 확신하였고, 노리쇠를 전진시키며 쏘라고 외쳤다. 공비도 동시에 장전하면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사격은 통나무 집에 있던 아군 매복조에 의해 선 실시 되었으며 공비 2명도 수류탄과 소총 사격으로 맞선다. 교전 과정에서 매복조의 송상홍 상병이 수류탄에 의해 다리에 파편상을 입었으나 이때 공비 1명도 다리에 총상을 입어 숲으로 도주했다. 이후 부상당하지 않은 적 1명이 보복 공격으로 근접하여 초소 창문을 향해 난사하였으나 뒤에 있던 아군은 중간벽에 의해 무사하였다.
같은 날 6시 48분 경, 정보분석조와 합동신문조가 교전 현장 일대에 도착하여 작전을 토의하던 중 직접 현장으로 올라가기로 결정을 내린다. 이때 부하 장교가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3군단 기무부대장 오영안 대령[42]은 강행하여 올라간다. 현장을 살피던 도중 기무부대장이 적의 예상도주로를 향해 불을 비춘 순간 그곳에 숨어있던 적의 저격으로 오 대령을 포함한 간부와 병사들이 사상당한다. 몇 분 뒤 부상을 당한 병력 후송을 위해 이동 중이던 의무 병이 무장공비 사격으로 부상을 당하였으며, 이를 구출하기 위해 추가로 이동하던 정보장교(서형원 대위)가 전사. 이로써 기무대장 오 대령을 포함한 아군 전사 2명, 부상 8명 발생.
같은 날 7시~9시 경, 특공연대가 퇴로를 차단하고 압박 작전을 펼쳤으나 안갯 속에서 계속 된 적의 조준 사격으로 아군 피해 누적. 1명 전사 6명 부상.
같은 날 10시 경, 아군의 압박작전 속에 특전사 3여단의 장선용 상사가 배후에서 접근하여 마지막 무장공비인 정찰조원 2명을 사살. 이로써 길었던 대간첩작전은 개시 49일만에 종료된다.[43] 이날 교전 중 총 3명 전사 14명 부상.
attachment/강릉 무장...
최후의 공비인 정찰조원 두 명을 사살하여 대간첩작전을 종료시킨 특전사의 장선용 원사(당시 상사).[44][45]

1996년 당시 군에 복무했던 현역 장병이나 작전에 투입되었던 예비군들의 생생한 체험담들도 여기저기에 올려져 있다.체험수기 1체험수기 2

체험수기가 하나 더 있었지만 창작이 가미되었거나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짜집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기억을 그대로 두서없이 주섬주섬 적어서일 수도 있지만 몇몇 사실 관계에서 오류가 보인다.

가령 출동 일시는 뙤약볕이 내려쬐는 8월이 아니라 9월이었는데 출동한 인원이라면 그 날짜를 잊기가 어렵다. 왜냐면 출동날짜가 추석 바로 전날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용으로 봐서 노도 부대 인원일 가능성이 높은데 노도부대쪽은 덥다. <추워 임마!!>또한 실제 그 부대 인원의 말로는 도로 검문 같은 임무가 아니라 숙영지에 도착하고 나서 바로 작전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검문은 통상 그 지역의 부대가 맡는 법이다. 타 주둔지 병력을 그것도 예비사단 병력을 보름씩이나 그 지역 검문을 맡길려고 출동시키지는 않는다. 그리고 본문내용의 교전일은 22일로 출동 후 4일 정도일 가능성이 높다.

전사자의 성이 바뀌는 것도 그러하다. 전사자의 성이 내용 진행 중에는 내내 김 씨로 나오다가 마지막에 송 씨로 바뀐다. 같은 부대에 속해있지 않았던 다른 부대의 병사들도 전사자의 이름까지는 기억을 못해도 성씨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상식적으로 함께 싸우다가 전사한 전우의 성씨를 오락가락할 수도 있다는 게 믿기 어려운 부분이다. 또한 위문품의 경우 개별 중대에 직접 전달하는 경우는 없었다. 언론의 전과 보도에서 '몇대대 몇중대에서 사살' 같이 중대 단위까지 보도하는 경우는 없었고 연대 단위의 'OO부대에서 공비 x명 사살'로 보도하게끔 기무사의 보도관제가 이루어졌으므로 위문품들이 직접 개별 중대로 향할 일은 없었다. 위문품들은 연대에서 전부 취합해서 각 개별 부대로 정기적으로 분배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위문품 불출이 늦어져서 연대본부 주둔지에 위문품이 쌓인 채 썩어가는 일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가 지적되어서인지 게시물이 삭제되었다.
5. 희생자[편집]
5.1. 국군 전사자[편집]
사고 개요 - 1996년 9월 18일 강릉 앞바다로 북한 무장간첩 26명[46]이 잠수함을 타고 침투, 49일 간의 추적 과정에서 육군 장병 12명 전사
오영안 대령은 1996.11.5.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무장공비와 전투중 피격으로 사망
서형원 소령은 1996.11.5. 인제지구 기동타격대장으로 출동하여 전투중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사망
우황용 소위는 1996.11.5. 연화동에서 공비와 교전중 수류탄 파편에 의하여 중상을 입음
홍동진 대위는 1996.10.12. 연곡면에서 매복작전을 하던 도중 김 모 상병의 오인사격으로 사망
전사자 명단 (아래 표기된 계급은 모두 전사후 1계급씩 특진 추서된 계급임)
오영안 준장(제3군단 제303기무부대장, 3사 4기)
서형원 소령(제3군단 불사조부대 기동타격대장, 703연대 정보참모, 학군 24기)
홍동진 대위(68사단 소속, 10월10일 강릉, 학사 21기)
이병희 상사(제3공수특전여단 소속, 9월 21일 강릉)
이동찬 하사(제702특공연대 소속, 11월 5일 홍천) [47]
강민성 병장(12사단 51연대 수색중대 소속, 11월 5일 인제)
강정영 병장(11사단 13연대 소속, 9월 22일 강릉)
김대영 병장(27사단 78연대 소속, 9월 25일 강릉)
최태웅 병장(36사단 소속, 11월 4일 홍천)[48]
한대성 병장(12사단 소속, 9월 29일 인제)
송관종 상병(2사단 31연대 소속, 9월 21일 강릉)
표종욱 상병(2사단 노도부대 소속, 10월 22일 양구)[49]
부상자 명단
이종갑 소령(3군단 정보분석장교,3사 16기) 1996.11.5.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무장공비와 전투중 피격으로 팔에 관통상
우황용 소위(3군단 통신소대장, 12사단 소속, 1974년생, 학군 34기.[50] 1996.2.29.입대, 1997.2.28.전역[51])
안장
오영안 준장은 1996년 11월 7일 국립서울현충원 제3장군 묘역에 안장(묘비번호 58)
한대성 병장은 1996년 10월 25일 국립대전현충원 사병제1묘역 119묘판에 안장(묘비번호 7925)
서형원 소령은 1996년 11월 15일 대전국립묘지 장교제1묘역 206묘판에 안장(묘비번호 2103)
홍동진 대위는 1996년 11월 15일 대전국립묘지 장교제1묘역 206묘판에 안장(묘비번호 2104)
나머지 장병은 1996년 11월 15일 사병제1묘역 119묘판에 안장
이병희 상사 7940
이동찬 하사 7941
김대영 병장 7942
강민성 병장 7943
최태웅 병장 7944
강정영 병장 7945
송관종 상병 7946
표종욱 상병 7947
5.2. 민간인 피살자[편집]
안상영(50세, 남) - 9월 23일 출입금지 지시를 어기고 매봉산에서 송이버섯 채취 중, 공비로 오인해 쏜 국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김용수(45세, 남), 이영모(54세, 남), 정우교(67세, 여) - 10월 8일 오대산에서 송이버섯을 채취하던 중 남성 두 명은 공비의 총에 맞아 살해됐고, 할머니는 둔기류로 머리를 맞은 뒤 목이 졸려 숨졌다. 특히 이영모는, 정확한 조준사격에 머리를 맞아 끔찍하게도 얼굴 부분이 아예 없어지다시피 했다 한다. 참고로 공비들이 기록한 수첩내용을 보면 세명은 모두 심문당한 뒤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뉴스

사실 송이버섯이 당시 제철이었는데, 송이는 재배가 안 되고, 나는 시기가 짧은 데다가 나는 지역도 한정되어 있다. 때를 놓치면 못 따는데, 송이 채취로 얻는 수익은 지역 주민들의 연간 수입 중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추석 명절, 송이버섯 제철, 관광 성수기, 고기잡이 철에 이 사건이 일어난 탓에 당시 강원도 지역 경제는 치명타를 입었다. 물론 자기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출입금지를 어기고 채취하는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다만 무장공비가 마주친 모든 사람을 사살한 것은 아니다. 당시 강릉면 임곡 1리에 거주하던 이규택의 집에 무장공비가 침투하여 식량을 요구했다고 하며, 이규택이 옥수수를 건네주자 공비는 이규택을 해치지 않고 떠났다고 한다. 이규택 외에도 공비가 집에 들이닥쳐 소금과 성냥을 요구하자 소금과 성냥을 넘겨주고 고향이 평양이라는 등 잡담까지 나누고도 살아남은 할머니도 있다. 물론 이 사람들은 운이 매우 좋았던 케이스일 뿐 마주친 것이 조금 더 악질적인 공비였다면 식량을 내주고도 살해당했을 확률이 높다.
6. 북한 무장공비[편집]
강릉무장공비구성원얼굴
중위 김동현
(처형)
상좌 김강훈
(처형)
중좌 만일춘
소좌 신영길
(처형)
소좌 류림
중좌 정영구
상위 김영일
(행방불명)
소위 안경섭
상위 김창복
대위 박태홍
대위 리영호
(처형)
대위 김연호
대좌 김동원
(처형)
소위 리광철
대위 김승호
(처형)
상위 송동철
(처형)
중위 량봉선
대위 원흥천
소위 리영철
(처형)
소위 김철진
(처형)
소위 리철진
소위 변의정
(처형)
소위 박정관
(처형)
소위 정성훈
상위 한민섭
침투한 무장공비들의 얼굴.[52]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모두 장교인 군관 계급이다. 이들 중 승조원들은 청바지와 운동복, 정찰조원과 안내원들은 복제품 국군 육군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복제된 육군 전투복은 멀리서 보면 비슷하지만 마감이 허술한 편이어서 가까이서 보면 차이를 알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무기로는 복제된 M16 소총, 북한제 AK 계열 소총 등을 사용했고 수류탄을 상당히 많이 사용했으며 45구경 콜트 권총도 사용하는 등 북한군이 주로 쓰는 공산권 무기 외에도 국군으로 위장을 하기 위해 서방 무기들도 많이 사용하였다.[53] 잠수함 내에서는 무려 RPG-7까지 발견되었으나 다행히도 이걸 사용하지는 않고 잠수함에 두고 나왔다. 물론 들고 나왔어도 대군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는 입장에서는 거추장스럽기만 하고 쓸모도 없으니 놔두고 왔을 것이다.

교전 시에는 부족한 탄약을 아끼려는 듯 교전시 단발사격을 주로 하였고[54], 수류탄을 자주 사용하였으며[55], 망원조준경도 없이 기계식 조준기로도 장거리 저격을 해대는 등 공격 정확도가 높았다. 또한 난전 중에도 아군의 움직임을 보고 전방에서 공격해오는 아군보다는 측후방에서 기동하는 아군에게 먼저 응사를 하는 등의 상당한 교전 능력을 보였는데[56], 이는 이들이 다수의 적을 상대 할 시 무엇을 우선순위로 둬야 하는지에 대한 훈련을 고도로 받았음을 의미한다.

특히 대부분의 사상자는 위에 설명한 정찰조 2명과의 교전에서 발생하였는데, 이들의 유품중에 자신들의 행적을 상세하게 기록한 수첩이 발견되면서 이동 루트라든지 행동방식 등이 알려졌고 이것들이 군 당국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어서 당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야간에만 이동했을 것이고 도로는 발각되기 쉬우니 산악지대로 다녔을 것이다 ↔ 오히려 밤과 낮, 산과 도로를 구분하지 않고 이동하였다. 다만 아군의 검문소라든지 몸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넒은 개활지 등이 보이면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야간을 이용해 이동하였다. 강원도가 인적이 드물다는 헛점을 이용해 포장도로를 타고 빠른 속도로 하루 평균 2,30km를 이동하며 군 부대의 포위망을 계속하여 뚫고 나갔다.[57] 이들은 자신들의 이동경로 근처에 아군이 있다 하더라도 과감하게 돌파하기도 했다. 작전나온 경찰간에 대화를 근처에 숨어서 기록하는 등[58]의 대범함은 놀라울 정도. 대신에 그만큼 여러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흔적을 감추었는데, 개울가에서는 바위만 밟고 이동하여 흔적을 남기지 않는등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족적을 감추거나, 마찬가지의 이유로 비온 직후에는 땅이 마를 때까지 이동을 하지 않았다. 이들이 가지고 다니던 물품중 고무포대가 있었는데 아군헬기가 나타나면 이걸 온몸에 뒤집어써서 바위처럼 위장하여 감시를 피했다고 한다.
식량과 물품이 부족하여 굶주리고 지쳐있었을 것이다 ↔ 오히려 초기에는 먹을게 넉넉했다. 식량의 경우 근처 민가나 텃밭을 털거나 나물과 열매들로 해결했고, 마침 당시 계절이 가을이라 지천에 먹을게 있었다. 옥수수, 감자, 양배추, 홍당무, 도토리, 달래, 머루 등. 보통은 생식했고 기회만 된다면 익혀 먹었다. 콩기름이나 꿀, 고추장 같은 것도 털었다. 심지어는 강아지도 잡아먹었다고 한다. 의복 등의 경우 위에 설명된 사살한 민간인과 군인에게서 빼앗아 입었다. 이들은 대담하다 못해 무모하기까지 한 모습도 많이 보였는데 민가를 털던 도중 집주인이 차를 몰고 집에 들르자 민간인이 차에서 내린 틈을 타 차에서 담배를 턴다든가, 민가에서 라면과 냄비 등을 훔친 뒤 인근 야산에서 대놓고 모닥불을 피워서 끓여먹었거나[59] 심지어는 털었던 곳을 또 털기도 했다. 그 뒤로도 근처에 인적이 없다고 판단되면 불을 피우고 숙영을 한다든가, 폐가나 축사가 보이면 몇 시간 동안 인적을 확인하고 들어가서 잤다. 비가 오면 훔친 비닐포대를 이용해 간이 텐트를 만들어 휴식했고 비트를 파고 잘때도 근처 버려진 무덤을 아래로 파고 들어가서 관 위에서 잠을 자는 등[60] 몸을 숨기는 방법도 다양했다. 다만 작전 후반부에는 아군의 추적이 집요해지자 신발이 닳고 해져서 수선한다든가, 자신들에게 필요한 물품목록을 작성하는 등 보급품이 부족해지는 것이 눈에 띈다. 총기수입할 기름이 없어서 콩기름으로 정비를 했으며, 끝에는 먹을것을 구하지 못해 아군이 먹고 버린 전투식량의 밥알을 모아둔다든가, 물을 구하지 못해 무의 생즙을 빨아먹기까지 한다.
임무가 실패하였으므로 당황하고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을 것이다 ↔ 정 반대다. 애초에 이들의 침투 자체는 성공적이었고 그저 귀환 과정에 잡음이 생겼을 뿐. 애초에 이들은 잠수함이 있던 없던 바다를 통해 귀환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군에게 들켜서 해안경계가 강화되고 잠수함을 뺏기자 어쩔수 없이 잠수함에서 탈출하여 플랜B에 해당하는 육상 루트로 귀환을 시도한 것. 탈출하기에 급급했던 것도 아니고 포위망을 우회하면서 애초에 계획에 없던 정찰 지역을 훨씬 벗어나게 되자 근처의 군 부대나 교통시설 등을 지속적으로 촬영하는등 본연의 임무에도 충실했다. 아군 경계병력이 있는곳 근처에 숨어서 그들의 말을 수첩에 기록하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다.[61] 초반에 다른 공비들과 헤어진 후 북상하던 중 출발할때 가지고 온 식량과 노획품들[62]로 임무 성공을 자축하며 조촐하게 만찬까지 벌이며 하천이 있을 경우 목욕까지 하는 등 상당히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사상 교육이 철저히 된 요원들이라 그런지 아군과 교전하고 도피하는 이후에도 '남조선 괴뢰들에게 한방 먹였다'고 기록된것을 보면 사기도 출중했다. 다만 중반쯤에 접어들어서는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북상과 남하를 반복하다가 방향을 잃고 상당한 시간을 헤매게 되며 그러자 발각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심지어는 민간인을 심문하여 현지 지리들을 알아낸 뒤 살해했다. 도로 표지판이나 국립공원 비석을 보고서야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도 했다. 수첩에도 이때부터 좀 당황한 기색이 많이 보인다. 나중에는 단파 송신기로 북쪽에서 내려오는 지령을 청취했으나 해독장비를 파기해버린 뒤라서 해독하지 못했고 이것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결국 인제 부근에서 진지 공사를 하던 아군 장병에게 노출되었다. 이후 매복조와 교전 후 1명이 다리에 부상을 당하여 거동이 힘들어지자 남은 1명도 귀환을 포기하고 죽음을 각오한 채 싸우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첩의 기록을 보면 사살되기 이틀 전 날짜에서 끝나는데 마지막 기록의 내용들이 여기서 마지막 싸움을 하고자합니다., 지휘관 동지 죄송합니다. 꼭 조국의 품에 안기고 싶었습니다.등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것을 예감이라도 한듯 하나 같이 죄다 비장하다.
피살자 11명 - 청학산 정상에서 총살된 채 발견된 11명. 계급으로 보면 가장 상관이라고 볼 수 있는 대좌 계급의 해상처장 등도 처형되었다. 대남침투를 위한 함정을 총괄하는 이들이 생포될 경우 많은 정보가 누출될 위험이 크기에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상처장과 해상부처장이 직접 잠수함에 탑승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며 따라서 이 침투가 이 문서 서두에 나온 것처럼 김영삼 대통령 암살 등 상당히 중요한 특수 임무였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처형 기준은 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북으로 귀환할 전투력이 있느냐 이며, 이 때문에 가장 높은 보직인 해상처장과 실세라 할 수 있는 정치지도원도 전투력(정확히는 사격 실력)[63]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다만 보직에 따라 처형한 것은 아니며 전투력이 있는 만일춘, 원흥천, 박태홍, 정영구, 류림 등 5명은 전투원으로 임무가 전환되었다.
대좌 김동원 (50, 해상처장) - 9월 18일 처형[64]
상좌 김강훈 (48, 해상부처장)[65] - 9월 18일 처형
소좌 신영길 (34, 정치지도원) - 9월 18일 처형
대위 리영호 (29, 항해장) - 9월 18일 처형
대위 김승호 (31, 승조원) - 9월 18일 처형
상위 송동철 (31, 승조원) - 9월 18일 처형
중위 김동현 (27, 승조원) - 9월 18일 처형
소위 변의정 (27, 승조원) - 9월 18일 처형
소위 리영철 (27, 승조원) - 9월 18일 처형
소위 김철진 (27, 승조원) - 9월 18일 처형
소위 박정관 (27, 승조원) - 9월 18일 처형
생포 1명
상위 리광수 (31, 승조원, 조타수[66]) - 9월 18일 생포
사살 13명
중좌 만일춘 (48, 기관장) - 9월 19일 사살
대위 원흥천[67] (34, 통신장) - 9월 19일 사살
대위 박태홍 (31, 부기관장) - 9월 19일 사살
상위 한민섭 (30, 전투원) - 9월 19일 사살
상위 김창복 (29, 전투원) - 9월 19일 사살
중위 량봉선 (29, 전투원) - 9월 19일 사살
신원 미상 정찰조원1[A] - 9월 19일 사살
대위 김연호[69] (36, 전투원, 안내원) - 9월 21일 사살[70]
중좌 정영구[71] (42, 함장) - 9월 22일 사살
소좌 류림 (38, 부함장, 안내원) - 9월 28일 사살
소위 리철진 (28, 전투원) - 9월 30일 사살
신원 미상 정찰조원2[A] - 11월 5일 사살
신원 미상 정찰조원3[A] - 11월 5일 사살
행방불명 1명
상위 김영일 (30, 전투원) - 아래 문단 참고

귀순한 이광수와 발견되지 않은 김영일을 제외한 24명의 시신은 12월 30일 북측으로 송환되었다.
6.1. 김영일의 행방[편집]
이광수는 잠수함 탑승자가 26명이었으며 그들 중 김영일이라는 30세 상위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다른 25명과 달리 김영일의 유류품은 발견되지 않았고 그의 도주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이광수 본인도 계속 진술을 번복하며 김영일이 승선을 했는지 안 했는지 스스로 헷갈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군 당국은 마지막 정찰조원 2명이 사살된 후 김영일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기에 김영일이 진짜로 승선을 안 했는지 도주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남한 영토 내에 김영일은 없다고 결론내리고 작전을 종료했다. 따라서 한동안 김영일이 도주자인지 미승선자인지 논란이 지속되었다.

김영일이 승선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진짜로 김영일이 혼자로 탈출했으면 '남조선 대군을 농락하고 생환한 공화국 영웅'이라며 선전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 선전물이 없는 것이 증거라고 주장한다. 북측의 매체에서는 잠수함 승선원은 포로가 되는 수치를 피하기 위해 전원 '영웅적으로' 자결한 것으로 선전되었다.

그 반면 김영일이 도주한 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김영일이 예정에 없이 막판에 추가 승선해서 이광수가 승선 여부를 헷갈려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등장했던 자신이 김영일과 같은 부대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나이가 가장 어렸던 김영일이 김일성 초상화를 들고 북으로 탈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증언은 매우 신빙성이 떨어지는데 이광수가 증언한 공비들의 신상 정보를 보면 30세인 김영일보다 어린 공비도 여럿이었기 때문이었다.[74]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른 뒤, 북한에서 '강릉의 자폭영웅들'이라며 이들을 영웅화한 선전 기념물을 공개했는데 이 사망자 명단에 김영일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즉 북한 당국에서는 김영일을 전사자로 선전한다.

아무리 북한이라도 다른 진짜 전사자도 24명이나 있는데 승선하지 않아서 북한에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자폭한 영웅으로 만들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가장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자면, 김영일 또한 동료 무장공비들과 함께 표류했고, 국군과 교전 중 사살되지는 않았으나 도주 중 어딘가에서 아사 또는 사고사하여 결국 죽었으며 그 뒤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겠다.

김영일이 발각되지 않고 한국에서 눌러앉았을 가능성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고정간첩이 되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하고 온 것도 아니고 얼떨결에 들어온 북한 사람이 신분증 하나 없이 한국 사회에 녹아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북한이 한국 사회를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숙청한다는 것을 근거로 김영일이 복귀하자마자 살해당한 뒤 전사자로 처리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으나 북한에서는 보통 이런 경우에 선전용으로 한동안 써먹은 후에 의문의 사고사 등으로 숙청하지 당장 써먹을 좋은 선전감을 낭비하지는 않는다.
6.2. 북한 당국의 선전물[편집]
북한 당국이 당시 침투한 무장공비들을 선전하기 시작하면서 사망자 명단[75]을 공개하였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강릉무장공비침투미화조각물 강릉무장공비침투공비사망자명단

당시 신원미상자 4명 중 상좌급 인물은 김강훈으로 신원이 밝혀졌고, 나머지 신원 미상의 전투원 3명은 각각 리광철, 정성훈, 안경섭 등으로 밝혀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귀순한 이광수는 명단에서 빠져있으며, 행방이 묘연했던 김영일이 사망자로 분류된 것도 알 수 있다.

강릉무장공비침투 참전렬사묘안장

해당 인원들은 전부 북한 당국의 예우 차원으로 공화국영웅칭호가 추서되었는데, 이들 중 김동원 대좌는 이 침투에 참가하기 전에 이미 2중 공화국영웅 칭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까지 더해져서 3중 공화국영웅 칭호가 추서되었다. 6.25 전쟁 참전이 아닌 대남공작임무를 수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김동원 대좌와 시신을 찾지 못한 김영일 상위를 제외한 23명 전원이 이례적으로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 에 안장되었다. 또한,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건물에 강릉 침투임무를 기념하는 벽화[76]까지 새겨서 붙혀주는 등, 북한 정권에 의해 엄청난 선전감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 표종욱 일병 실종사건[편집]
TV를 보고 오늘(11월 6일) 아침까지도 헌병이 전화해서 종욱이한테 무슨 소식온 거 없냐(고 하니, 우리는 북한군이 표종욱 일병을 살해했다는 것을 확인한) 뉴스도 안 듣냐, 테레비 안 봤냐 그랬더니 (헌병대가) 뉴스하고 테레비가 장땡이냐.
- 표종욱 일병의 누나 표시연.[77](출처 뉴스)
이 작전에서 국방부는 병크를 벌이며 전 국민의 분노를 샀는데 그 이유는 전사한 표종욱 일병에 대한 대응 때문이다. 국문학과 출신이던 표종욱 일병은 당시 2사단 공병부대 소속이었는데, 10월 22일 숙영을 위해 싸리나무를 모으던 도중 하필이면 도주하던 북한군 침투병들과 마주친다. 북한군은 한국군으로 위장하기 위해 표종욱 일병을 습격해서 고문 뒤에 살해했고, 표종욱 일병의 시신은 근처에 숨겨졌다. 그런데 군대는 표종욱 일병이 사라지자 제대로 된 주변 수색 없이 평소 여자관계가 안 좋았다며 애정 문제에 따른 탈영으로 처리하였다. 이유는 소지품에서 연애 편지가 발견되었다는 게 근거였다. 그리고 2사단 헌병대 군탈체포조는 표 일병의 집에 가서 "아들 숨겨놓은 거 알고 있으니 빨리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렸다.

부모가 아들의 '탈영' 소식을 듣고 다음날 새벽같이 부대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들었을 때, 여자 문제도 없었고(9월 초 휴가를 받아 집에 왔을 때 여자친구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집안도 화목해 탈영할 이유가 없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부대장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는 분명히 사고라는 생각에 직장도 팽개친 채 10월 24일과 25일 부대가 있는 양구읍을 찾아가 표 일병의 큰아버지, 숙모, 고모와 함께 이곳저곳을 찾아 헤맸지만 헛수고였다.[78] "탈영누명 너무 억울하다" 분통(조선일보)

그렇게 국방부가 표 일병 가족을 상대로 2주일 가까이 뻘짓을 벌이던 중인 11월 5일 도주하던 북한군이 사살되었는데, 그 사살된 북한군이 표 일병을 공격했던 그 북한군이었고 표종욱 일병의 군복(야전점퍼와 상의)과 인식표 등[79]을 착용하고 있었다. 거기에 지금까지 전투 내용을 기록한 노트를 국군이 발견했고,[80] 한국군은 발견한 노트에서 한국군 작전내역에 기록되지 않은 아군 전사자를 확인했다. 거기에 적군의 유류품에서 표 일병의 시계를 확인했고 표 일병의 유가족들도 TV에서 그것을 보게 된다. 그제서야 군은 뒤늦게 수첩의 기록을 토대로 수색작업을 개시하였고, 단 하루만인 11월 6일에 숨겨져있던 표 일병의 시신을 찾아낼 수 있었다. 표 일병의 시신은 작업하던 곳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 낙엽더미 속에서 팬티만 입은 채(위장하려고 전투복을 빼앗아 입었으니까)로 발견되었다.[81] 어처구니 없는 사실은 수첩으로 표 일병의 살해를 분명 확인했고 심지어 TV에 표 일병의 전사가 방송된 지 하루가 지난 와중에도 헌병대는 가족에게 아들이 탈영했다고 전화하는, 제정신이 박혀있는지 의심스러운 짓까지 하고 있었다.

애당초 표 일병 실종 직후 1개 소대, 아니 1개 분대만 투입해서 제대로 수색만 했어도 발견이 가능했을 것이다. 가족들이 그를 찾아헤매고 있을 때 정작 부대는 표 일병 수색작업에서 손뗀 지 오래였다. 상식적으로 적군과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 병사가 안 보이면 혹시 적의 공격에 당한 것이 아닐까 예상을 한 번쯤은 해야 정상인데, 아니 그 이전에 준 전시 상황에서 병사를 혼자만 제대로 된 무장도 없이 보내서는 안 되었는데, 작업이 필요해서 하더라도 병력을 보내서 경계 및 경호를 진행하면서 했어야 했는데...그런 건 아무것도 없이 '병사가 사라졌다 = 탈영'이라고 바로 보고하는 추태를 벌인 것이다. [82] 이후 군은 유가족들에게 그야말로 무릎을 꿇은 채 싹싹 빌어야 했고, 그와 별개로 당연히 여론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으며 대통령과 국회도 이를 추궁했다. 해당 공비가 수첩과 함께 북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고, 시신도 아주 철저히 은닉했다면 언젠가 발견될 때까지 표 일병은 쭉 작전 중 탈영자 취급이었을 테고, 유가족들 역시 그러한 불명예를 함께 감당해야 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83] 유가족들 본인도 이런 말을 했다.
정말 우리 종욱이가 끝까지 이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생 자식을 탈영 엄마라는 거와 우리 종욱이는 탈영병이라는 거 가슴에 안고 내가 죽을 건데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표 일병 어머니(출처 뉴스)
그러나 표 일병의 유가족은 헌병대의 책임을 묻지 말아달라고 했다고 한다.

표종욱 일병의 가족관계는 부모와 누나 2명이 있는 고명아들이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표종욱 일병이 사망하여 그 집안은 남계(男系) 후손이 단절되었다.

사실 이때 한참 대간첩 작전이 진행 중인 상황이라, 상부에서는 분명히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는 싸리비 제작 작업을 자제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전방 부대들은 겨울 폭설에 대비한 제설 장비 보급이 되지 않았기에 늦가을 무렵엔 싸리나무 가지를 모아 싸리비를 제작하는 것이 필수 작업 중 하나였다... 상부 지시가 이를 금하는데 예하 부대들이 어길리가 없다고 여긴 헌병대가 그 난리를 피웠을 가능성도 있다.[84] 애초에 공비가 숨어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산에 병사를 달랑 혼자 보낸 것 자체가 문제였던 것.

이 사건 이후에 싸리비를 대체할 목적으로 야전부대에 플라스틱 대빗자루가 대대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2010년대 이후의 야전부대엔 싸리비 작업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런 안이한 마인드는 21세기 들어서도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2015년 1월 16일 육군 31사단 소속 A(당시 22) 일병이 K2 소총과 공포탄 몇 발을 가지고 무장탈영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23일 부대 근처 해안가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알고보니 근무 중 사고로 떨어져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결론이 났다. 국방부의 삽질이 또 애꿎은 병사를 탈영병으로 만드는 일이 또 벌어졌던 것이다. # 이 경우는 같이 근무하던 군인이 잠을 자던 도중 발생한 사고[85]로 잠자던 군인이 처벌받을까봐 두려워 탈영한 것 같다고 보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8. 후속조치[편집]
사건 당시 해당 해안지역을 책임지던 부대는 제68동원사단[86]이었다. 8시에 출근해서 6시에 칼퇴근 한다면서 흔히들 파라다이스 사단이라고 하는 별명이 있었으나 이 사건 후 섹터의 지휘관들은 당연히 보직해임# 되어 버렸고, 해안경비 사각지대의 문제점, 수색작전의 미비점 개편을 위해 기존 동원사단을 해체하고 상비사단으로 새롭게 창설하였으니 23사단 철벽부대가 바로 이 부대이다. 물론 해군력이 보강되어 연안함대인 1함대에서 충분히 해안경계를 커버 가능하며, 강원도 동해안 철책은 철거 이야기가 오가는 등 사실상 철수 수순을 밟고 있다.[87] 그리고 2014년 부터 강원도에서 철거 계획을 밝혔다.

사건이 발생한 시기가 오면 사건을 잊지않기 위해 강원도 지역 1군 사령부 예하부대는 침투사건을 재현하는 훈련인 Remember 9.18 을 매년 실시한다. 특수부대가 대항군을 맡고, 이들이 목표한 지점까지 이동하기 전에 발견, 차단선을 구축, 봉쇄하는 훈련이다.
9. 작전과정의 문제점들[편집]
사건 내내 한국군은 미숙한 대처와 일처리로 일을 키웠다. 거의 이렇게만 안 하면 된다 정도의 사례가 속출했다고 보는 것이 좋다.
대간첩작전 중의 군수지원 문제
병사들을 쪼개서 매복지로 보낼 것만 생각했지, 매복지에서 식사와 식수 보급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전투가 벌어지면 이후 탄약보급은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해당 병사들을 교체해야 될 경우 어떻게 교체해야 될지에 대해서는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매복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취사반에서 만든 식사를 추진 보급을 하려했으나, 매복하고 있는 병사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차량도 들어가기 힘든 험지에 매복하여 사실상 보급이 불가능하고, 최악의 경우 보급하러 들어가다가 아군에게 오사당할 가능성까지 있었기에 난장판이 벌어졌다고 한다. 또 식수 부족으로 인해 장병들이 엄청 고생했다. 수통 하나에 들어가는 물로는 하루종일 숲과 산속에서 매복하고 있는 장병들의 갈증을 충분히 해갈(解渴)시켜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보다못한 예비군들은 전투지역 경계에 배치되면 매일 집에서 물을 넣은 1.5L 페트병 2개씩 들고가서 하나는 자기가 쓰고 하나는 현역들에게 줬다고 한다. 월남전 당시에 국군이 정글에서 수통을 2~3개씩 매고 다녔다는걸 기억하고 그대로 실행했으면 그나마 나았을 문제다. 아니 당장 미군은 카멜백 도입 이전인 이 시기에도 단독군장에 수통을 2개 차는 것이 표준이었는데 미군을 항상 보면서도 수통을 1개만 지급했으니 문제였다.
언론에 작전계획 등의 정보가 대부분 노출됐던 문제
당시 군에서는 군이 노력한다는 성과를 내기 위해서 언론에 필요이상으로 작전상황을 누설하였다. 작전의 성패와 최 일선의 장병들 및 민간인들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언론은 엠바고를 지켜야 한다. 언론 뿐 아니라 군 자신이 애초에 그런 정보를 기자들에게 노출시키면 안되는데 그런 보안의식이 약했다. 너무 오랜만의 대규모 대침투작전을 벌인 탓인지, 이런 작전에 대한 보안의식 보다는 '군이 뭔가를 하고는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게 더 중요하다 생각했던 탓이 컸다. 예를 들면 특종을 찾아온 기자들에게 우리 군은 현재 얼마만큼의 병력이 어디어디를 수색 중이며 내일은 어디어디를 집중 수색할 계획이다 라는 식으로 말해서 작전 현황과 작전계획이 언론에 계속 유출되는 바람에, 라디오 뉴스로 그 내용을 들은 공비들이 그에 맞게 도주경로를 적절하게 변경하며 수색을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사살된 공비가 남긴 기록에도 나온 내용이라 빼도박도 못한다.
아군에 대한 수하 및 오인사격 문제
상당수의 아군 병력이 매복이나 수색 도중 다른 아군의 오인사격에 사망 또는 부상하였다. 매복작전 중 적과 조우한 상황에서 수하를 하는 바람에 답어 대신에 총격이나 수류탄 공격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88]
아군의 전반적인 훈련 미흡
병력 이송시 헬기 레펠 경험[89]이 부족하여 낙상으로 인한 부상자를 여럿 낸 경우도 있었다.[90] 적과 조우시 공포심에 의해 조준사격이 아닌 머리 위 사격을 하는 바람에 아군 사상자를 내거나 적의 도주를 허용한 경우도 있었다. 실전에 투입된 특전사 부대원조차 적과의 조우 순간 장전이 안된 총을 가지고 작전에 투입한 바람에 제때 응사를 못하여 전사자를 낸 상황도 있었다. 병력을 이송하는 헬기가 방향을 잘못 잡아 엉뚱한 산에 병력을 내려주기도 했다[91]. 초급간부와 분대장을 대상으로 발간한 실전 사례 모음집에 나오는 내용은 가관인데, 어느 부대인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수류탄 안전핀만 뽑고 안전클립은 둔 채로 던진 탓에 도망가던 무장공비 추적을 포기했거나, 지급 받은 수류탄을 어떻게 결속할 줄 몰라 우왕좌왕하거나 불안하다며 휴대를 거부하는 것을 물론, 어떤 부대는 아예 병사들이 삽탄을 할 줄 몰라(...) 간부들이 대신 해줬다는 등 여러 번 읽어봐도 믿겨지지 않는 추태들이 여러 소개되어 있다. 수류탄이야 위험한 물건인지라 실전에서도 관련 훈련부족이나 병사 개개인의 긴장도에 따라 실수하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삽탄을 못한다는 것만 봐도 당시 군대의 훈련 수준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알 수 있다.[92]
작전 중 군기에 대한 문제
아무렇게나 놓여진 피복을 보고 적이 매복방향과는 반대로 도주한 경우도 있었으며, GOP 지역의 경우, '무장공비가 여기까지 올 리 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상부에서 하달된 후방 경계 명령을 대충 이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군의 지원을 받은 열상장비로 야간에 공비를 추적하는 것 또한 매우 어려웠는데, 그 이유가 작전 나간 병력이 이런저런 이유로 많이 움직이거나 이탈한 경우가 많아서 근처에 있는 공비를 구분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93] 예비군의 경우 더욱 심각하여 경계 근무를 하다 무단이탈하여 동네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거나, 총기를 분실해 버리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고, 현역 지휘관이 '작전은 현역이 할 테니 사고만 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94] 게다가 현역 병사들도 문제인 게 전투식량이 맛없다고 아무데나 막 버리는 바람에 그걸 공비들이 주워먹고 이로 인해 공비들이 지치지 않고 계속 교전을 벌일 수 있었다.
작전중 무장 탈영
수색이 진행되던 9월 22일 강원도 양구군의 한 부대에서 소속 병사가 초소로 이동 중 이탈, 내무반에 총기를 난사하고 민통선 북쪽 방향으로 탈영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고로 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빡친 군 사령관이 '투항하지 않으면 무장공비로 간주하고 사살하겠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다음날 오후 군 병력과 대치하던 탈영병의 자수로 31시간여 만에 사건이 종결되었다.
지휘관의 작전 지휘 문제
봉쇄선 형성이 늦어서 공비의 도주를 허용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작전의 장기화에 따른 유연한 운영이 부족해서 병력 전체에 피로감을 증대시켰다. 작전 말기 기무부대장이 직접 작전현장에 나갔다가 어이없게 전사한 일도 결국 상황판단의 미스로 인해 일어난 결과였다.[95]
병력들의 공격력/방어력 문제
공비를 제압하는데 있어서 최일선 보병들의 화력문제가 불거졌다. 기존까지는 보병 분대의 화력을 소총수의 숫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후 화력강화를 위해 유탄수가 분대당 두명씩 배치된다. 화력도 문제였지만, 병사 개개인의 방어구도 문제였다. 목숨이 달려 있는 실제 전투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방탄조끼를 지급받은 병사는 극히 드물었고 이로 인해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병사들이 많았다.
10. 이후[편집]
수많은 인명피해가 나는 등 도발의 증거가 명백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일어난 뒤인 9월 23일, 북한측은 처음으로 인민무력부 담화를 통해 "훈련 중 기관 고장을 일으켜 표류하다 좌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 이전까지 북한이 간첩사건 자체를 부정한 것과는 아예 다른 태도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10월 2일 판문점 군사정전위 비서장 접촉에서 박임수 대좌[96]는 "백배 천배 보복하겠다."면서 적반하장식으로 남한을 협박했다. 이에 남한도 격앙하여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펴는 한편, 언론에선 요인 암살, 시설 파괴 등의 목적을 띠고 남파된 무장공비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렇게 남북간에 극한적 대결상황에 돌입하자 미국 측은 "당사자들이 자제해 주길 바란다"며 제동을 걸었다. 이 태도 때문인지 미국은 사전에 첩보위성 등을 통해 북한 잠수함 표류를 알고 있었다는 추정을 낳기도 했으며 이로 미루어 보아 미국도 해당 사건이 의도적 도발이 아니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미국은 북한 잠수정 침투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첩보를 한국에게 제공하지 않고 지켜만 봤다. 이것과 여러 정보를 한국측에 넘긴 이유로 미 해군 정보분석관 로버트 김은 감옥에 갔다. 한국계 미 스파이 사건 백동일 주미 해군무관의 뒷 이야기

이 사건이 일어나자 한국 내부에선 대북 강경파가 득세했고, 보수 언론들은 이를 앞장서서 부추겼다. 이에 따라 김영삼 정부는 대북경협을 동결하고 경수로 부지 인수와 서비스 의정서의 서명을 유보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시 경수로 지원도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같은 시기 막 시작되고 있었던 4자 회담과 관련해서도 북한이 4자 회담 설명회에 참석한다 해도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북측 역시 경수로 지원은 제네바 합의 사항으로, 이를 파기할 시 '핵 동결 약속' 역시 파기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런 식으로 남북이 강경대치로 나가자 미국이 중재에 나섰다. 미국 정부는 한국에 대해서는 강경책을 누그러뜨리는 한편, 북에 대해서는 공식적 사과는 아니더라도 '유감'이라도 밝히도록 종용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12월 29일 조선중앙통신과 평양방송을 통해 영어와 한국어로 '유감'이라며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를 했는데, 재야사학자 임영태에 따르면 이 메세지는 한국보다 미국을 향한 간접적 메세지라고 보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김일성이 직접 사과한 김신조 일당 사건과 함께 북한 측의 몇 안 되는 대남도발 사과의 사례로 남아 있다. 어쨌든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고 이후 사살된 북한 공작원들의 유골을 판문점을 통해 북한 측에 전달했다.[97]
강릉 무장공비 사건 당시 북한측의 반응 일지.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에 불응예비군 4천여명이 향토예비군설치법위반으로 고발되었다.#
11. 대중매체에서[편집]
취사병 전설이 되다 - 웹툰 판에서 연대주임원사가 이 사건 당시 말년병장이었다고 언급한다.
하얀마음 백구 - 이스터 에그로 지도 오른쪽 상단 동해바다에 잠수함이 한 척 떠있는데, 이 사건을 뜻한다.
조용한 가족 - 작중 시간대가 이 사건과 겹친다.
선전포고(영화) - 무대를 일본으로 바꾼 영화
배철수의 만화열전 - 고우영 삼국지 도사 우길 편에서 허공의 밀서를 전달하려는 첩자가 잠수정을 타고 나타난다는 식으로 묘사했는데 이후 택시기사의 신고 끝에 잡힌다는 식으로 나온다. 그 이후는 삼국지연의의 내용대로 허공을 포함한 그 일족이 모두 몰살당하고 손책이 허공의 식객에게 습격을 당한다는 내용.
12. 후일담[편집]




유일하게 체포된 공비 출신인 이광수는 전향 후 대한민국 해군 군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정훈교육 강사로 각 부대를 돌기도 한다. 학위도 따고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아 잘 살고 있다. 기사 이제 만나러 갑니다 255회에 이광수를 생포했던 경찰 중 한 명인 최우영이 출연해 들려준 증언과 이광수 본인이 정훈교육 때 한 강연내용을 들어보면 다른 공비들과 혼자 떨어져 행동하다 그 지역 농민 부부에게 발각되었는데 설령 신고를 한다 해도 "설마 그렇게 빨리 군경에게 연락이 가겠어?"라는 생각에 방심하고 남편과 잡담을 나누다 부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북한 기준으로 판단하다보니 외진 산골 민가에까지 전화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생포한 이후의 해프닝 하나를 이야기했는데 붙잡은 이광수를 차에 태워 이송 중 창 밖으로 비친 시내를 보여주며 "보라, 우리 대한민국이 얼마나 자유로운 나라냐." 자랑하는데 이 말을 들은 이광수가 의아해하며 하는 소리가 "자유롭다면서 왜 데모를 하나?"였다고 한다.[98]

이 사건으로 인해 남색 바탕의 것을 쓰는 해군을 제외한 국군의 전투복용 포제 계급장 색이 바뀌었다. 이전부터 미군의 저시인성 계급장을 보고 추진되어오긴 했지만 군에서는 필요성도 실감하지 못했고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아군이 시계가 어두운 시간임에도 총상으로 인한 피해가 컸던 원인이 밝은 색의 계급장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나오게 되자 적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국방부 블로그에 올라온 이 글에서도 이 사건을 결정적인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으며, 사건 직후에 입대한 사람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계급장이 저시인성으로 바뀌었다고 교육받았다 한다. 또한 공비 사건 이후로 전군에 배포된 사고사례 보고 공문에 의하면 계급장으로 인해서 고위 간부부터 차례로 공비에 의해 저격을 당하는 사고사례가 전파되었고, 이를 계급장 교체의 이유로 들었었다.[99]

attachment/강릉 무장...

당시 모 특공연대의 사진. 명도와 채도에 손을 본 사진인데도 맨 앞에 앉아있는 대위의 철모 계급장이 아주 뚜렷하게 보인다. 구형 계급장의 고시인성 문제는 이정도로 심각했었다는 하나의 증거다.[100] 다만 저 사진은 바로 코앞에서 찍은 사진이고, 2차대전 당시 저격수들은 그 먼거리에서 계급장이 보여 그걸로 판단하는게 아니라, 각종 지시하는 동작을 보고 장교 여부를 가려냈다고 한다. 강릉 무장공비 사건 당시 사살 당한 기무사 대령의 경우 공비가 계급장 보고 쏜게 아니라, 본인이 야간에 안보여서 후레쉬 켰다가 참사가 일어났었다.

바로 전 해(1995)에 SBS의 인기 드라마 모래시계로 벼락 명소가 된 정동진역의 유행에 오히려 불을 지핀 사건이기도 하다. 안인리/안인진리에서 작전이 집중되었는데 작전 반경에 정동진역이 포함되고 또한 매일같이 공비침투 뉴스에 안인진리와 함께 정동진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 바람에 정동진역의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개그맨 김대희가 군대 시절,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투입되었다. 그 당시 계급은 병장이였다. 그것도 말년이었다고 한다.

당시 PC통신 논객이었던 김유식은 당시 하이텔에 '잠수함이 수상하다'라는 내용으로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이 이상하다면서 혹시 자작극이 아니냐는 식의 글을 썼다가 경찰 보안분실로 끌려가 38시간 동안 심문을 받은 적이 있다.당시의 경험담을 담은 수기 그리고 절대로 심문받은 사실을 알리지 말랬는데도 불구하고 PC통신에 대공분실 수기를 올렸다가 정체불명의 전화가 자꾸만 오자 겁이 나서 영국으로 도피유학을 갔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1996년 9월에 경찰은 PC통신 내에 '무장공비 자작극론'을 올린 유저들에 대해 대대적으로 수사를 시작하여 33명을 불구속 입건한 바 있으며, 특히 천리안 등지에 <그들이 무장공비일까> 등의 게시글들을 올린 대학원생 윤 모는 10월 31일에 구속되어 12월 18일에 징역 1년 6개월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윤 모가 항소하여 1997년 4월 25일에 서울지법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검찰이 이에 항소하자 1998년 8월 13일에 이를 기각하고 항소심에서 게시글만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이적표현물 소지 건은 유죄가 적용되어 징역 6개월 및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이 있던 시기에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등 일부 매체들은 공익근무요원 전 모가 천리안에 올린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내용에서 "남한당국이 사건을 조작하여..." 식의 일부 내용만 잘라 발췌하여 PC통신 위험론을 제기했으나 본문을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듯 이는 오보임이 밝혀져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다. 원문은 그냥 '이 일로 남북의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남북의 권력자들은 이를 또 이용하겠지'라며 적대적 공생을 지적하는 글이다. 당시 그가 올린 게시물은 해당 사건을 전후해 PC통신 역사상 최다 조회수인 3,100여명을 기록했다고 한다.

국방홍보원에서 이 사건을 바탕으로 '얼룩진 산하'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다. 간략하게나마 당시의 전투 진행을 볼 수 있다. 물론 국방홍보원에서 만들었다는건 감안하고 보도록 하자. 12

attachment/강릉 무장...

작전 당시 강릉시는 그야말로 전쟁 분위기였다고 한다. 육/해/공의 거대한 대간첩 작전 수행을 위해 거의 계엄령 수준으로 군/경의 민간 이동 통제가 이루어짐은 물론 시내에는 온갖 군용차량들이 가득했고, 인근 강릉공항[101]에서는 평소보다 몇 배는 많은 이착륙으로 소음이 심했다. 또한 멀지 않은 서쪽의 산들에서는 5분이 멀다 하고 수류탄 폭음과 사격소리가 끊임없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사진은 전투경찰과 함께 버스를 검문하는 육군. 고등학교에서는 약 한 달 가량 야간자율학습을 하지 않았다.

또 작전이 한창이던 9월 27일이 추석이었는데, 어느 지역까지 성묘를 허용해야 하고, 무장간첩이 성묘객 틈 속에 끼어드는 일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가 문제가 되었다. 결국 명절을 맞아 성묘 가는 사람들에게는 태극기와 주민등록증을 소지하라는 공지가 내려졌고 강원도 북부 작전지역의 주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성묘하러 가는 진풍경을 연출해야 했다.

당시 강릉 산골 마을마다 살고있는 마을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군인들이 투입되었는데 지키라고 갔다가 주민들의 동정표로 먹을 것도 받고 집에 전화도 하게 해 줬다고 한다.

북한에선 노획당한 잠수함을 돌려줄 것을 뻔뻔하게 요구했지만 당연히 좆까라는 대답만 돌려받았다 한다.

이 사건에서 무장공비들이 북한에서 불법복제된 M16A1[102]을 사용했는데, 강릉안보박물관에 전시된 당시의 실총을 보면 근거리 사격에 용이하게 멜빵끈을 특이한 형태로 개조해 놓았다. M16 소총을 사용한 이유는 아군으로 위장하기 위함도 있고 노획한 탄약을 사용하려는 목적도 있다. 여러 증언에 의하면 탄약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인지 한 발씩 끊어서 점사를 주로 했다고 한다.

작전 진행 중인 1996년 10월 1일 최덕근 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영사가 독극물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최 영사는 국가안전기획부의 화이트 요원으로 북한의 러시아 무기 밀수를 조사하고 있었고, 시신에 상당한 액수의 돈이 그대로 남겨져 있었으며 북한 공작원들이 사용하던 것과 같은 독극물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북한이 배후로 의심되었으나 레드 마피아 관련설도 있는 등 여전히 미제로 남아있는 사건이다.

2007년 SBS 드라마 로비스트에서 송일국의 아버지가 육군사관학교 출신 대위로 이때 당시 작전에 참여했다가 사망하는 것으로 본격적으로 드라마가 시작된다.

2014년 SBS 드라마 쓰리 데이즈에서 극중에 가상으로 묘사된 '1998년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이 사실 미국 군산복합체의 음모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물론 이건 드라마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일본의 가공전기 소설과 영화 《선전포고》는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2004년 제작된 프리웨어 FPS 쿠마워(KumaWar) 의 미션 중에 이 사건을 구현한 미션이 있다. 꽤 된 게임이긴 해도 게임 자체가 실제 군사작전을 현실적으로 재구성한 만큼 고증은 수준급으로, 무장공비들이 사복을 입고 AK만이 아니라 M16을 들고 나오는 것까지 고증했다. 단 M16은 제작 영상에만 등장하고 막상 게임에서는 전부 AK를 들고 나온다. 나머지는 무장공비들이 미군 험비를 타고 다니는 것만 빼고 저 위의 집단처형 현장까지 구현해 놓았다.

사건 당시 북한 잠수함을 신고한 택시기사의 일화는 안보의 중요성을 심어주자는 차원에서 제7차 교육과정 시절인 2001년에 나온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도덕 교과서에 수록된 바 있다.

당시 해안경계를 담당하던 68사단은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이 죄다 보직해임당했다. # 보직해임 및 현역부적합전역당한 68사단 지휘관/자의 숫자가 20여명이었다.

홍동진 대위를 오인사격으로 사살하고 만 김 모 상병은 군법에 회부되어 중과실에 의한 상관 살해 혐의로 국군교도소에 중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이후 68사단은 1998년 11월 30일 부로 부대가 해체되었다. 그리고 그 부대를 대신해서 제23보병사단이 창설되었다.

당시 무장공비와 교전[103]하다가 팔에 관통상을 입은 3군단 정보분석장교 이종갑 소령(3사 16기)[104]은 다음해 중령 진급심사에서 탈락하였다. 이후 부상을 이유로 군문에서 쫒겨난 후 일정한 직업도 없이 하루하루 힘들게 지내다가 인력사무소에서 중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 ### 원래 장교단이 사관학교 위주로 돌아가긴 하지만 비육사 출신은 당연히 받아야 하는 대우도 받지 못하는 반면 비슷한 상황의 육사 출신은 전례가 없는 특혜를 받는 등 차별이 아주 심하다는걸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 ###

1980~1990년대 민방위나 예비군 훈련에서는 예비군 지휘관이 월남전 썰을 풀어줬다면, 2000~2010년대는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썰을 풀어주는 경우가 많다.

노획한 상어급 잠수함은 군부에서 조사 후 강릉시 강동면의 강릉통일공원에 전시하고 있다. 이 잠수함은 1986년부터 북한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것으로, 최고속도는 8kn(시속 약 14.8km) 정도였다고 하며, 들어가면 내부공간이 엄청나게 좁을 뿐 아니라 보존관리가 잘 안 되어 있어 악취가 진동한다. 침실은 무장공비들이 보안 유지를 위해 고의적으로 폭파 및 방화해서 그을음이 가득하다.

밤 10시 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귀가하던 학생이 군인들의 검문에 걸려 연행된 일이 있었다. 속초와 고성군을 잇는 검문소에서 공비로 오해받은 것이다. 가방 속 교과서를 보여주려다가 포승줄에 묶였다고 한다.
13. 참고 자료[편집]
대한민국사: 1945~2008 - 임영태 저. 들녘. 2008. p783~785.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