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꼬꼬무3 홍범도 이야기

호크준 2022. 8. 18.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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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1868년 평안남도 평양부 서문(보통문) 내에 위치한 무열사[10] 앞마을의 양반집 에서 머슴살이하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출생지가 평안남도 양덕군, 평안북도 자성군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홍범도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머슴살이하던 아버지마저 그가 9살이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난다.


이것 때문에 당시에 어린 홍범도는 자신의 뿌리조차 모른 채 다른 양반집에 머슴으로 보내졌다. 10대 중반이던 1883년, 머슴살이를 청산하고 인생을 바꿔보고 싶다는 마음에 평양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상관을 살해하고 탈영했다.# 이후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된다.#

신계사에서의 생활은 홍범도에게 있어서 인생의 전환점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생 교육을 못 받았던 홍범도는 이때서야 신계사에서 글을 깨치고 한국사에 대해 배우게 되는데, 이순신도 이 때 알았다고 한다. 홍범도가 출가할 때 상좌였던 승려 지담(止潭)이 수원 사람으로 이순신 가문인 덕수 이씨였다(홍범도일지). 덕수 이씨가 조상의 이름값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대대로 무반을 배출하게 된 사연이 있는데, 덕수 이씨인 지담이 조상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는 것. 지담에 대해서는 1880년 승려 의성과 함께 신계사 유리전(瑠璃殿)을 중수한 기록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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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였던 아내 이옥구 여사도 이때 알게 되어 나중에 결혼까지 하게 되고, 이 여사의 임신을 계기로 부부가 함께 환속했다고 한다. 항일투쟁 노선 외길을 걸었던 홍범도 개인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 뒤 신계사를 떠나 함경남도 북청군으로 아내와 거주지를 옮기게 된다. 신계사를 나온 뒤에 오갈 데가 없게 되어 처가가 있는 북청으로 가던 길에 건달패들을 만나 아내와 잠시 헤어졌다가 이후에 다시 만났으며, 두 아들과 북청에서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한동안 제지소에서 일했으나 1886년 3년치 임금을 체불한 고용주를 말다툼 끝에 살해하고 도주해 강원도 북부 산악 지대에서 사슴, 노루, 멧돼지 등 짐승들을 사냥하였던 산포수 생활을 했으며,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시기까지 10년 동안 평범한 사냥꾼으로 생활했다.
2.2. 항일 활동에 투신하다[편집]
총을 잘 쏘기로 유명했다. 먼 거리에서 총을 쏴 유리병의 입구를 통과해 병의 바닥을 맞히는 사격 실력을 보유했다고. 현대 총기로도 이 정도 사격 실력은 쉽지만은 않으며,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당시 총기의 성능을 고려해보면 더욱 놀라운 실력. 이 실력으로 일대 포수들에게 지지를 얻고 '포계(砲契)'라는 포수 권익 단체를 만들고 대장이 된다.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직후 강원도(북한) 회양군에서 김수협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유는 일제의 총포기화류 일제 단속법이 발령됐기 때문. 사냥을 그만두었을 때도 '이 총으로 짐승이 아닌 왜놈들을 사냥하겠다'는 다짐으로 구국 운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포수 시절에 갈고 닦은 사격술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포수로 생계를 책임지던 홍범도와 조합원들에게 의병 투쟁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의병은 14명으로 전해지며, 대부분 함께 사냥 일을 하던 강원도 산포수들이었다.

이 시절의 그는 말 그대로 전설의 스나이퍼인데, 동료들을 먼저 가라고 한 뒤에 홀로 경기도와 강원도, 함경도를 연결하는 철령에서 매복하여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했다. 야사에 따르면 '수십 명을 쏴 죽이고 돌아왔다'는 말도 존재한다. 북상하던 유인석의 의병대와 연계하여 일본군과 3차례의 전투에 들어갔으나 1896년 이후 을미의병의 기세가 사그러지자, 홍범도 역시 의병을 해체하고 귀향해 다시 산에서 포수 생활을 시작했다.

1905년 대한제국의 을사늑약 체결 시점에서는 딱히 의병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전후한 시기에 정미의병이 시작되고 일제가 국내 포수들을 대상으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령에 따라 강제 총기 수거령으로 생계까지 막막해지자 함경남도 갑산 일대의 포수들을 모아 다시 궐기한다.

홍범도는 최대 600명~700명으로 생각되는 의병대를 이끌고(대대장) 주로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를 무대로 하는 유격전을 벌였다. 말이 무대지 사실상 산속 수백 리를 축지법급으로 숨어다녔다는 이야기가 되며, 이때 민중에서는 '나는(날- + -는) 홍범도'라는 별명까지 붙는다. 머슴 아버지 밑에서 자라 어릴 적부터 머슴살이를 했기에 엄청난 힘과 체력을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증언에 의하면 홍범도는 다른 사람들보다 체구도 우람했으며 근육량도 엄청났다고 한다. 포수 생활을 하면서 산을 자유자재로 넘었던 원동력.

이 시기 일본 헌병대 및 일본 육군 정규부대를 상대로 크고 작은 37회의 전투를 벌였다고 알려져 있다. 1908년 4월 일제에 붙잡힌 아내 이옥구(이옥녀)가 모진 고문으로 옥사한다. 남편에게 귀순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는 협박에 "계집이나 사내, 영웅호걸이라도 실낱 같은 목숨 없어지면 그뿐이고, 내가 그런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죽어도 안 쓴다."라고 끝까지 버텼다고 한다.

1달 후 장남 홍양순도 6월의 함경남도 정평배기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한다. 2021년 3.1절 기념식 때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해군잠수함사령부 홍범도함에서 근무 중인 여명훈 중위가 대신 받았다. 영상. 홍양순은 원래 어머니와 함께 일제의 회유 협박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는 "가서 너희 아버지더러 투항하라고 해라"라며 그를 홍범도에게 보냈지만, 의병부대를 찾아간 홍양순은 도리어 아버지를 따라 의병대원이 되었다고 한다. 홍양순이 홍범도에게 "이제 그만 투항하시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홍범도는 그 자리에서 아들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면서 "네가 지금 왜놈들 앞잡이가 돼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러 왔느냐"고 일갈했다고 한다.

차남 홍용환도 아버지와 함께 연해주로 이주하여 의병 활동을 하다 결핵으로 병사하고 말았다.

1910년 결국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의병 항쟁 여건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간다. 이 시기 국내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의 일반적인 조류에 따라 홍범도 역시 1911년 연해주로 망명했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해서 수시로 월경해 접경 지대의 친일파 및 일본 군경을 괴롭히는 유격전을 수행했다.

홍범도가 훗날 공산주의 독립운동 단체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였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혁명의 저지를 위해 국제 간섭군이 러시아에 진주(시베리아 내전)할 때 일본군이 연해주에 진주한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홍범도를 포함한 연해주 소재 조선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소탕하려 했다. 이에 대응해 조선 무장독립운동 단체도 적극적인 교전을 벌임과 동시에, 그나마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되던 적위군과 손을 잡게 되었는데, 홍범도와 공산당의 첫 만남이었다.
2.3. 전성기: 봉오동과 청산리[편집]
이후 함경북도로 수차례 진출해 1919년 10월 함경남도 혜산진 일대에서의 유격전 성과로 지명도를 높인 홍범도는, 1920년 봉오동 일대에서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이 연합해서 결성한 대한북로군독부 예하 북로 제1군 사령부장(부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를 치르고 그로부터 4개월 뒤 청산리 전투에 참여해 활약했다. 청산리 전투의 주도적인 인물로 알려진 김좌진이 우파 인사이고, 말년에 현지 한인들에게 인심을 잃었던 탓에, 중국 내 한인 사회에서는 청산리 전투의 주요 지휘관으로 김좌진보다 홍범도를 더욱 높게 친다. 홍범도가 현지 주민들에게 민심을 얻고 있었던 것은 당시 일본군의 보고서에서도 드러난다.
…당대(當隊)가 폭도[11]의 풍모를 가장하고 행동했더니 촌민은 이를 매우 환영하고 자진하여 주식(酒食)을 향응하려고 하였다. 때문에 일반(주민)의 의향을 측정하기 어려운 점이 적지 않다.…
1908년 10월 13일 제3순사대 경부(警部) 와타나베 마사카쓰(波邊正勝)의 보고서
10월 하순 이도구·어랑촌 및 봉밀구 방면에서 일본군대에 대하여 완강히 저항한 주력부대는 독립군이라 칭하는 홍범도가 인솔한 부대였다. 홍범도의 성격은 호걸의 기풍이 있어 김좌진과 같은 재질이 있는 인물이 아닌 듯하고 앞서 홍범도가 간도방면을 동분서주하고 있을 무렵 일반 조선인, 특히 그 배하(配下)에 있는 자로부터 신(神)과 같은 숭배를 받고…
이도구·어랑촌·봉밀구 부근의 전투에 당연하여 일본군의 포위 중에 빠진 것 같이 그의 전술이 졸렬한 것을 빈정대는 것보다도 몸을 던져 부하를 독려하고 일본군에게 일시(一矢)[12]를 보복하려는 것이었다고 간주하는 것이 지당할 것이며, 그는 지금 한쪽 다리에 관통 총상을 입고 치료를 받고 있다 하는데 그에 대한 일면을 판단할 수 있다.…
1921년 조선총독부 간행 「간도출병 후의 불령선인 단체 상황」

반면, 거꾸로 대한민국에서는 홍범도가 결국 소련군과 손을 잡았었다는 점 때문에 1980년대 후반까지도 홍범도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거나 간단하게 언급만 되고 홍범도의 말년도 '독립운동을 하다 아무도 모르게 쓸쓸히 죽었다' 정도로만 언급되었다.

사실은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의 공로가 반반이라고 보는 편이 좋으며, 특히 일본군끼리 서로 싸우게 한 작전은 홍범도가 주도했다.

육군대장 이범석 초대 총리 겸 국방장관이 쓴 <우등불>에는, 홍범도가 봉오동에서 큰 전공을 세우기는 했으나 청산리에서는 일본군의 군세에 겁먹고 말도 없이 달아났다고 한다. 여러 사람의 기록을 직접 읽고 판단하기를 바란다. 다만 이범석 총리는 파시즘에 경도된 반공주의자였다는 점을 감안하여 읽을 필요가 있다.
2.4. 소련 합류[편집]
그런데 이후 계속된 일본군의 토벌전 및 만주 군벌과의 충돌로 인해, 부득이하게 홍범도를 포함한 독립군 세력은 소련 영내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에 탄압받던 소수민족과 연대하던 소련 정부의 방침은 당연히 매력적인 선택지였고, 곧 홍범도는 레닌과 트로츠키와 독대해 마우저 권총을 선물받을 정도로 소련 한국계의 거물로 성장하게 된다.
2.4.1. 자유시 참변[편집]
1921년 연해주 및 시베리아로 후퇴한 독립군은 결국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자유시로 이동했으며, 이 시기 홍범도는 그간의 무훈으로 새로 창설된 대한독립군단 부총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곳에서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을 목격하게 되는데, 많은 독립군이 목숨을 잃었다. 다만 홍범도 측 부대는 이미 자유시에서 무장해제를 한 상태였기에 사상자는 없었다. 윤상원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의 소식을 전해듣고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 사변> 논문에서).

자유시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대한의용군 독립군에 대한 군사재판에서, 홍범도는 고려혁명군사법원 재판관의 위원으로 참석하게 된다. 우익들이 홍범도를 공산주의자이고 자유시 참변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것인데, 당시 상해파 독립운동가들은 이에 대해 홍범도를 배신자라고 매도했다고 한다. 고려혁명군은 항일의병장으로서 명성이 높은 홍범도를 위원으로 선임해 재판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홍범도가 자신을 선임한 이들에게 이용당했다는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있다.

홍범도는 재판에서 병사들이 피해를 보지 않고 공정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위원으로 참가했다고 하지만, 재판과정에서 위원을 맡은 일은 홍범도 개인에게는 무척 불행한 일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요컨대 자유시참변 전후 홍범도의 행적이 일부의 비판처럼 동족에 대한 배신, 반역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후 그의 활동이 다분히 소련 공산주의 소속의 일원 정도로 후퇴, 축소되었다는 점은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당시 항일 독립진영의 독자적 세력이 일본보다 워낙 열세였고, 때문에 일본에 맞설 타국의 힘을 빌어야 한다는 현실론을 따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홍범도를 비롯한 사회주의계 인사들에게는 그 대상이 소련이었고, 이승만 등은 외교를 통해 미국을 끌어들이는 것을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훗날 임시정부의 광복군도 중화민국 정부와 공조하였고, 김홍일이나 최용덕 등은 중화민국군의 일원으로 싸우기도 했다.
2.4.2. 그 후[편집]
1923년 8월 하바로프스크에서 사할린부대 출신 김창수와 김오남으로부터 불시에 공격을 당해 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홍범도는 블라디미르 레닌에게서 받은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레닌의 증명서 덕에 석방됐다고한다.

1921년 3월께 자유시에 도착한 홍범도가 당시 주도권을 쥔 대한의용군 중심의 독립군 통합에 찬성했다가, 이후 주도권이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가자 1921년 5월 기존 태도를 바꿔 고려혁명군 중심의 통합에 힘을 실은 것도 홍범도로써는 하루라도 빨리 통합이 마무리되어 항일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해석이다. 당시 홍범도에게는 대한의용군, 고려혁명군 그 어느 쪽과도 이해관계가 없었다고한다.#

이후 1922년 일본의 연해주 간섭군 철수를 조건으로 일본이 요구한 항일무장투쟁 단체의 해산이 이루어지고 나서, 결국 홍범도 이하 공산당 측 독립군은 무장해제되었다. 다른 동료들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거나 다른 지방으로 흩어졌는데, 돌아갈 곳도 가족도 없던 홍범도는 결국 러시아에 남아 소련 시민으로서의 삶을 시작해야만 하게 되었으며, 이때 2번째 부인과 재혼하게 된다.

홍범도장군 입국신고서
홍범도의 소련 입국신고서. '목적과 희망' 항목에 고려독립이라고 쓴 것이 인상적이다.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주최로 열린 극동민족대회(극동피압박인민대회 혹은 원동약소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간다. 여기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트로츠키를 통해 홍범도를 따로 불러 단독 면담을 한 다음, 금화와 홍범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은제 마우저 C96을 선물해주었다. 독립군 중 트로츠키나 레닌과 단독 면담을 한 것은 홍범도가 유일하며, 이때 레닌에게 받은 권총은 현존하지 않지만 권총집은 지금도 현존한다. 권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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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이후[편집]
홍범도는 그간의 무훈으로 얻은 인망에 힘입어 1923년 연해주 남부에서 한인 콜호즈를 비롯한 지역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이후 연해주의 고려인 지도자 중 1명으로서 지속적으로 활동했으나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이뤄진 고려인 강제 이주로 인해 당시 소련 영토였던 카자흐스탄 SSR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후 크즐오르다에 위치한 고려극장에서 고려인 희곡 작가 태장춘의 배려로 수위장을 맡았고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였는데, 홍범도는 매월 80루블의 연금과 50루블의 보수를 받아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1936년 기준, 소련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150 ~ 200 루블, 연금은 25 ~ 50 루블이었다. 1달 수입이 130 루블이면 당시의 평균 임금보다 꽤 낮은 편이지만, 부양가족이 없었고, 수위 자리도 홍범도에게 생활비 챙겨주려 일부러 마련한 자리라 편했기에 생활에 큰 문제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태장춘의 아내 리함덕에게 독립운동가로서의 활약상을 구술하고, 이를 바탕으로 <홍범도 일지>가 만들어졌으며, 홍범도 일지를 토대로 한 연극 <홍범도>가 고려극장에서 상영되는데, 이를 관람한 홍범도는 자신을 너무 추켜세웠다며 겸연쩍어했다고 한다. # 홍범도가 맡은 직책인 수위장도 고려극장의 배려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일은 널널하였다. 홍범도는 고려극장의 제일 뒷편에 앉아 당시 인기리에 상영 중이던 연극인 <춘향전>, <심청전> 등을 관람하고 주연 배우들과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물자를 아껴 전선의 병사들을 돕자'는 선전활동을 하기도 하였고, <레닌기치>를 읽으며 이웃들에게 전선 소식을 전하거나, 직접 글을 투고하여 젊은이들에게 참전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 이오시프 김이 쓴 <소련한인극단>에 의하면 홍범도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73세의 나이로 소련 정규군에 지원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한인예술가 전창화에 의하면 자원입대를 거절당한 홍범도는 자신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사격장에 사람을 불러모은뒤 25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작은 동전을 총을 쏴 명중시키는 사격실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1942년 4월 홍범도가 몸담고 있던 고려극장이 카자흐 SSR 동부 우슈토베(Үштөбе / Üştöbe)로 옮겨간 이후에는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10월 25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교전 중 사살당하거나 투옥 중 고문 후유증으로 젊었을 때 사망한 경우가 많다. 홍범도와 똑같이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고려인의 한 명인 김경천은, 홍범도가 죽기 1년 전인 1942년 1월 2일에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알려졌다고 쓴 이유는 김경천 항목 참조.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운동가들 대다수가 일본군에 의해 사살당하거나 좌우 갈등에 희생당하거나, 가난에 시달리고 망명 국가에서 암살당하는 등의 고생을 겪으면서 천수를 누리지 못 해 죽고 말았는데, 홍범도는 보기 드물게 천수를 누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만리타국에서 쓴 입국신고서에서 소원을 묻는 질문에 "고려 독립"이라고 쓸 정도로 죽는 순간까지 조국 독립을 염원했던 그가, 결국 전쟁이 끝나는 것조차 보지 못했으니 어떤 심경으로 눈을 감았을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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