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1. 개요[편집]
1991년 3월 26일.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 지역에 살던 5명의 국민학생들이 인근 와룡산에 올라갔다 동반 실종되었다가 2002년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이다. 소위 국내 3대 영구 미제 사건 중 하나.
아이들이 도롱뇽 알을 채집하려고 집 근처 와룡산에 올라갔다가 실종되었는데, 사건 초기에 도롱뇽이 개구리로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5명의 아이들은 일명 '개구리 소년'으로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개구리 소년으로 잘못 알려진 이유는, 도롱뇽 알을 구하러 나갔다가 실종되었다고 보도하면 당시 개구리와는 달리 도롱뇽을 잘 모르는 전국의 아이들이 도롱뇽에 대해 막연한 공포감을 지니고 괴생명체로 오인할까 봐 개구리로 보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개구리랑 달리 도롱뇽은 국내 서식지가 제한적인지라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도 아닌지라 개구리 소년 쪽으로 알려졌다.
다만 아이들이 가는 길에 만난 친구에게는 "탄피를 주우러 간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와룡산에 있던 육군 제50보병사단 사격장에서 흘린 탄피를 주우러 갔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둘 다일 수도 있고.
대중들 사이에서는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이나 '개구리 소년 살인 사건', 혹은 간단하게 '개구리 소년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정식 사건명은 '대구 성서초등학생 실종 사건'이었으나, 2002년 9월 26일에 시신들이 발견되면서 '대구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으로 변경되었다.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과 묶어 국내 3대 영구 미제 사건으로 칭하고 있으나, 이 두 사건과는 달리 밀폐되지 않은 산 속에서 5명을 한꺼번에 살해한 범행 수법과 윤곽조차 잡지 못한 범인 등으로 인해 이 사건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도 범인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미제 사건 중 하나가 되었다.
2. 사망자[편집]
우철원: 1979년생. 당시 6학년.
조호연: 1980년생. 당시 5학년.
김영규: 1981년생. 당시 4학년.
박찬인: 1982년생. 당시 3학년.
김종식: 1983년생. (빠른 년생) 당시 3학년.
3. 사건 발생[편집]
1991년 3월 26일은 지방자치제가 다시 시행된 이후 최초로 전국의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의 지방의원을 뽑는 선거인 1991년 지방선거일이어서 임시공휴일이었다.[2]
아침 8시 무렵, 성서국민학교(現 대구성서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3~6학년 어린이 우철원 군(6학년), 조호연 군(5학년), 김영규 군,(4학년)[3] 박찬인 군, 김종식 군 그리고 김태룡 군(이 셋은 모두 3학년) 6명은 조호연 군의 집 근처에서 놀고 있었는데, 조 군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던 청년이 아이들에게 "시끄러우니까 나가서 놀라"고 핀잔을 줬다.[4]
6명 가운데 김태룡 군은 이때 아침밥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급히 아이들을 뒤쫓아 와룡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따라잡았지만, 같이 산에 따라갈까 하다가 "너무 멀리 가서 놀지 말렴, 위험하니."라는 부모님의 말이 생각났고, 또 아침을 먹을 시간이기도 해서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5] 그 뒤, 우철원 군을 비롯한 5명의 아이들은 분유 깡통과 막대기를 챙겨들고 인근 와룡산으로 향했다.
조호연 군의 형 조무연 군(당시 중학교 1학년, 1978년생, 현재 42~43세.)은 자전거를 타고 와룡산 입구에 갔다가 아이들을 만났는데, "도롱뇽 알을 찾으러 간다"는 말을 듣고 아이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와룡산 기슭 마을에 살면서 시내에 나가 파출부 일을 하는 김순남 아주머니가 9시쯤 아이들을 목격했다고 한다. 김 아주머니는 일찌감치 투표를 마치려고 학교 쪽으로 내려오다가, 와룡산 쪽으로 올라가는 5명의 아이들과 지나쳤다. 그 때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2시간 안에 갔다 올 수 있을까?" 등의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고 한다.
우철원 군과 같은 반 학생이었던 김경열 군과 이태석 군(1979년생, 현재 41~42세)이 "12시쯤 아이들을 와룡산 입구에서 봤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점심 먹기 직전, 우철원 군이 아이들과 산 쪽으로 가길래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와룡산 기슭에 사는 김이수 아주머니는 "14시 무렵에 5명의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같은 학교 4학년에 다니던 함승훈(1981년생, 현재 39~40세) 군은 아이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와룡산 바로 밑 군인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그는 이날 동네 형들과 함께 도롱뇽 알을 찾으러 와룡산 계곡에 갔다. 형들과 떨어져 혼자 와룡산 중턱에 있는 무덤가 근처까지 올라갔는데, ''그때 산 위쪽에서 10초쯤 간격으로 날카롭고 다급한 비명소리를 2차례 들었다''고 진술했다.[6] 하지만 같이 올라갔던 형들은 듣지 못했다고 한다. 함 군은 "이때가 점심 먹기 직전이었으니까, 11시 30분쯤 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김종식 군의 어머니 허도선 씨와 김영규 군의 어머니 최경희 씨는 함 군이 산에서 비명을 들었다는 11시 30분쯤에, 똑같이 "가슴이 오그라드는 듯한 묘한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가 와룡산에 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집에 돌아오면 야단이나 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점심 때가 훨씬 지나서도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부모들은 18시쯤부터 와룡산 주변에서 아이들을 찾다가 허탕을 치고 19시 50분에 경찰에 신고하였다. 경찰은 아이들이 와룡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보고, 부모들과 함께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산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사건 당일인 91년 3월 26일 서구 중리동에 위치한 도살장 부근 정류소에서 아이들이 버스를 같이 타는걸 목격했다는 여성의 제보가 있었으나 묵살되었다고 한다.당시 목격내용
4. 경과[편집]
사건 초기 경찰은 뚜렷한 근거도 없이 무작정 5명의 아이들이 가정불화로 가출한 것이라는 엉뚱한 수사 방향을 정하는 우를 범했다. 5명 아이들이 모두 집안 사정이 부유하진 않았어도 별다른 문제 없이 화목했기 때문에 가출할 만한 사유가 없었던 데다, 애초에 5명의 아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일시에 가출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본격적인 수사를 늦추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이 사건이 매스컴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면서, 5월 5일 당시 대통령 노태우의 특별 지시로 모든 경찰과 군인이 총동원되어,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된 와룡산 주변은 물론 전국을 이 잡듯이 뒤졌다. 초반에는 수색 인력이 부족해 와룡산 서남쪽과 연못만 수색했는데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가 7월부터 대구지방경찰청 산하에 수사본부가 차려져 총 25개조에 1조당 25명으로 구성됐고, 이곡동 성서파출소 옆건물에 둥지를 틀었다. 10월 24일부터 대구지방경찰청 차장이 수사본부장을 겸하면서 대구지역 군경 수천명이 탐침봉까지 들고 와룡산 전체를 뒤졌으나 찾아내지 못했다.
대구경찰청 수사본부는 1996년 해체 전까지 5년 간 연인원 30만명을 동원하여 산악수색 48차와 일제 검문검색 43차 외에 복지시설 및 종교단체 1천여개소, 가정집 11,000세대를 각각 수색했고, 성서초 졸업생 1,800명과 공단 노동자 19,000여명에게도 수소문해 제보만 570여건이나 됐지만 전부 허사였다.
현상금이 많았던 탓에 허위제보도 잇따랐는데, 경북 구미에선 목격 제보가 왔고, 부산에서 앵벌이로 커피를 팔거나 새우잡이배에 납치됐다는 등 제보도 나왔으나 찾지 못했으며 "아이들을 내가 데리고 있으니 돈을 내놓으라/또는 OO로 찾아와라" 같은 장난전화가 빗발치기도 했고, 자기가 실종 어린이들 중 한 명이라는 장난전화를 하며 부모를 놀리는가 하면, 정신이상 증세를 앓고 있던 어린이가 "내가 개구리 소년"이라고 주장하고 떼를 쓰며 난동을 부리거나 부모가 자녀를 시켜 장난전화를 시키기도 하는 등, 이렇게 부모와 조사 중인 경찰들을 허탈하게 하여 수사에 혼선이 생겼다.
다행히 어떻게든 이 사건을 해결해보자는 의지가 강했던 덕분에, 각 기업들이 개구리 소년들을 찾기 위해 홍보에 진력했다. 그래서 전화카드나 담배갑은 물론 당시 어린이들이 즐겨 보던 만화, 비디오테이프 등에는 어김없이 개구리 소년과 관련된 광고가 삽입되었고, 그 외에 우유나 과자 포장에도 개구리 소년 찾기 광고가 인쇄되었다.
특히 포항제철은 대구경찰청에 현상금 1천만원을 기탁해가며 전단 80,000장을 임직원과 고객들에게 뿌렸고, 한진그룹도 대한항공과 한진고속 승객 및 임직원, 고객들을 상대로 100만장을 뿌렸다. 럭키도 수퍼타이 등 전 제품에 실종자들의 사진을 붙이고, 수퍼타이 CF '미아찾기 캠페인'을 통해 홍보했으며 국민신용카드도 1991년 11~12월까지 대금청구명세서를 담을 우편봉투에 개구리 소년 찾기 광고를 실었다.
한국담배인삼공사는 미아찾기 캠페인 참여사로서 88담배에 아이들 사진을 삽입했고, 부산택시조합도 1992년 달력에 사진을 실었다. 그 외에 제일제당, 남양산업, 남양알로에[7], 대도제약[8] 등지도 사보에 사진 및 명단을 실었다.(참고)
또한 개구리 소년을 주제로 한 영화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1992년 11월 개봉)이나 노래도 제작되었고, MBC 《생방송 여론광장》- '얘들아, 어디있니?' 편(1991년 5월 4일 방영분)을 비롯해 SBS 《그것이 알고싶다》(1993년 3월 21일 방영분), KBS1의 《공개수배 사건 25시》(1993년 6월 26일 방영분) 등에서 심층 분석하기도 했다. 심지어 대교출판에서 해당 사건을 소재로 한 동화《개구리 잡으러 간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이기창 저)》를 출간했다.
한편으로는 1970년대에 남파 간첩을 훈련시키는 교관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북한 공작원이 남한 고교생 등을 납치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북한 공작원의 납치설도 떠돌았다. 또 허무맹랑한 UFO 납치설[9] 등이 제기되었으며, 심지어는 "나병 환자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아이들을 납치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이 때문에 경찰이 나환자촌까지 가서 수색하려다 한센인들과 마찰을 빚었다. 심리학자와 심령술사, 역술인들 역시 이 대열에 동참하면서 경주 왕릉 매장설, 김종식 자택 매장설, 고속도로 교각 매장설 등 온갖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큰 관심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찾지 못했고 결국 영구미제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생업을 포기한 채 전국을 돌며 자식들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 부모들의 눈물겨운 노력도 허사가 되어 갔다. 1993년 1월에 실종자 부모들이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에게 탄원서를 냈지만, 9월에는 직접 수색을 포기했다. 1995년에 경찰은 컴퓨터로 만들어진 가상 몽타주를 실은 전단을 2만여장이나 뿌렸고, 이듬해엔 대구경찰청 수사본부가 해체돼 관련 업무가 달서경찰서 수사전담반으로 인계되어 경찰서장이 본부장을 맡고, 수사인력도 총 10명으로 줄었다. 1997년 8월에는 40대 여성이 법정에서 자신이 개구리 소년을 유인 후 암매장했다고 밝혔지만 허위 진술로 판명났다.
사건 발생 약 10년 후인 2001년 7월에 전남 신안군 지도면 증도의 한 염전에서도 제보신고가 들어와 경찰이 급파됐으나 허위로 판명났고, 그해 10월 22일 김종식 군의 아버지 김철규 씨가 슬픔을 술로 달래며 살던 게 화근이 되어 간암으로 사망해 다른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10]
유골 발굴 전인 2002년 9월, 한 남성이 "아이들이 묻힌 곳을 알고 있다"며 거짓 제보를 했는데,[11] 경찰은 이 남성의 몽타주[12]를 만들어 전국에 수배했고, 결국 경찰서에 자수해서 체포된다. 이때 "노태우 정부가 강경대와 김기설 사건 등 당시의 어수선한 시국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아이들을 죽여 암매장한 공작 사건"이라는 주장하는 등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였고, 조사해 보니 10여년 전 권투해서 돈을 벌겠다며 집을 나갔다가 머리를 다쳐 정신이상 상태였으며, 서울역과 명동성당 등지를 전전하던 노숙자였다. (기자협회보, 연합뉴스)
5. 결말[편집]
세간의 관심이 거의 사라졌던 2002년 9월 26일, 실종 11년 만에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라갔던 오우근 씨에 의해 5명의 유골이 와룡산 중턱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은 구 육군 50사단 사격장 부지였으며, 50사단은 이미 1994년에 북구로 이전한 상태였다.
이 지역은 과거 군부대 사격장과 가까이 있어서 탄피가 많이 발견되었고, 실제로 인근 어린이들이 탄피를 모으기 위해 와룡산에 자주 올랐다는 제보도 잇따라, 일각에서는 오발탄에 의한 타살로 추정되었다.
발굴 이틀 후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다시 구성해 의욕을 보이는 듯했으나, 경찰들은 11년 전과 마찬가지로 또 성급한 수사를 해 빈축을 샀다. 대구 달서경찰서[13]는 시신 발견 신고를 받고 출동한 후, 무얼 믿었는지 현장보존도 하지 않고 과학수사대도 부르지 않은 채 곡괭이 등을 이용해 땅을 파헤쳐서 현장을 훼손시켰다. 또 정확한 부검도, 현장감식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들이 파헤쳐낸 유골만 봤으면서도, "상식적으로 봤을 때 타살 흔적은 거의 없는 거 같다."든지 "조난을 당했고 추위에 떨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이다"라고 주장해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경찰이 계속해서 아이들의 조난을 주장하던 것에 대해 와룡산 기슭에 컨테이너를 두고 살던 할머니는 "(길을) 잃어버리긴, 갓난쟁이도 아니고 국민학교 5학년, 6학년씩이나 된 애들이 뭘 그래(길을 잃어)? 그건(동네 뒷산에서 조난당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고 일축했으며, 김영규 군의 아버지 김현도 씨 또한 "바로 뒤에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고, 밤이 되면 그때나 지금이나 주변 마을 불빛이 환합니다. 이런데 무슨 조난을 당해요?"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리고 여기서 경찰은 사건 현장을 건드려서 크게 훼손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그 당시 그것이 알고싶다에 보도된 영상을 보면 의경들이 삽질을 하고 형사들이 유골을 함부로 마대에 정리해 담아놨다. 이 꼴을 본 서울대학교 법의학과의 이윤성 교수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할 말을 잃었을 정도. 그래서 시신 중 감식반의 현장 감식을 받은 시신은 단 1구뿐이라고 한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제작진이 2002년에 유골에 대한 미스테리를 방영할 때, 실종된 소년들과 같은 연령대의 남자아이들을 모아 어두워진 후에 와룡산에서 마을로 내려가게 실험했는데, 아이들은 무서워하는 기색은커녕 긴장하는 기색조차 없이 마을로 "대단히 쉽게" 돌아왔다. 다만 아이들이 실종된 1991년 당시 인근은 전형적인 농촌이었고, 이 방송을 찍은 2002년에는 주택가 및 아파트가 유골 발견 지점 인근까지 확대됐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유골 발견 지점 인근 500m 근방에 수십여 가구가 사는 마을이 있었고, 좀 더 바깥으로는 당시로서는 구마고속도로로 불렸던 중부내륙고속도로의 지선이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바로 앞에 있는 불빛을 보고도 마을로 못 내려왔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당시 농촌이었던 이 동네의 아이들은, 동네 뒷산 정도는 놀이터나 같을 정도로 산으로 자주 놀러 다녔다.
게다가 한 아이의 옷소매가 뒤로 묶인 상태였고, 이 매듭의 형태나 강도가 잘 풀리지 않도록 잘 묶인 형태로, 보통 사람들이나 아이들이 아닌 전문가들이 쓰는 형태였기 때문에, 이것을 타살의 근거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아이들이 추위에 떨다가 옷으로 덮으려고 했다는 증거, 매듭의 모양은 저체온증에 이성을 잃으면 설명되지 않는 이런저런 행동을 할 수도 있다"라는 억지 결론을 내려 유족들의 화만 더 돋구었다. 이에 유족들과 '전국 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 모임'이 2005년에 국가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으나 2006년 11월 9일에 기각당했고(선고 2005가합69514), 이에 유족 등이 항소했으나 2007년 10월 25일에 서울고등법원 측도 같은 판결을 내렸다.(후속 기사)
더 가관인 것은, 1993년 3월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경찰조차도 "와룡산은 높은 산이 아니라 야산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곳에서 조난당할 가능성은 없다"라고 밝혔었다는 점. 아이들이 조난당한 상태였다면, 수천 명의 군경이 수색하는데 생매장이라도 된 게 아닌 이상 눈치를 못 챘을 리가 없다.
결국 법의학자들의 부검 결과, 둔기로 맞거나 흉기에 찔려 타살된 것이라는 추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사망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았고, 당연히 범인도 알 수 없었으며, 범죄 도구도 불분명해서 경찰이 여러 도구를 가지고 조사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다만 가장 유력한 범행도구는 용접용 망치로 밝혀졌다.
2003년에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해체했고, 2005년 11월 28일에 유족들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소시효 연장/폐지를 촉구했지만 2006년 3월 26일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으며 2015년엔 내사마저 종결됐기에 이제 와서 범인이 잡힌다고 해도 처벌할 수 없다. 2021년 현재까지도 범인 또는 범인을 아는 사람이 자수하지 않는 이상 잡힐 가능성조차 안 보인다.
6. 수사[편집]
6.1. 왜 시신이 늦게 발견되었나[편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되지 않아 수많은 군인과 경찰, 그 밖에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총 동원되어 와룡산을 뒤졌는데, 장장 11년 6개월이 지나고서야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와룡산은 높이 300m 정도의 야산에 불과하고 산이 가파른 것도 아니라 완만한 산인 데다가, 정상까지 올라가보면 그리 높지도 않고 동네 주민들이 산책 코스로 올라가는 수준밖에 안 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다른 장소에서 피살된 아이들이 나중에 잠잠해지자 와룡산에 암매장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법의학자들이나 범죄심리학자들의 분석은 "아이들이 살해되고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매장되었다"라는 데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실제로 와룡산은 야산이지만, 아이들이 놀러갔다고 알려진 서남쪽의 '불미골'이 아닌, 당시에 존재하던 저수지에서 반대쪽 능선을 지난 '새방골'에서 발견되었고,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지점은 와룡산에서도 골이 가장 깊고 수풀이 우거진 지점이었다.
2011년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의 분석으로는, 90년대 초를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야산들 대부분이 녹화사업 전이라 민둥산에 가까웠고 와룡산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이 인근은 군 사격 훈련장이 있기 때문에 성인들도 발길이 뜸하였고, 그만큼 수풀이 우거진 지점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비가 내리면 실개천 같은 게 형성되는 지점이기도 했다고 한다. 11년이 지나서야 유골이 발견된 이유에 대해선 사건 당일 저녁에 비가 내린 탓에, 아이들의 흔적이 모두 빗물에 씻겨 내려간 탓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리고 발견 당시 쉽게 눈에 뜨인 것은 그 해 여름 폭우로 살짝 덮인 흙 등이 씻겨 내려갔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당시 아이들이 살고 있던 지점에서 산 반대편까지 간 것에 대해 아이들의 부모들은 "왜 아이들이 그곳까지 갔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역시 탄피 등을 주우러 갔거나, 범인이 일부러 아이들에게 "탄피 등이 많은 곳을 알려주겠다"고 유인했거나, 아니면 정말 다짜고짜 아이들을 외진 곳까지 끌고 갔을 것 등등의 분석이 나왔다.
아무튼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와룡산에 대한 수색은 의외로 그리 철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여론에서도 살인이 아니라 실종, 납치 등에 비중을 두고 있었던 데다가[14] 앞서의 증언들처럼 와룡산에서 어린이들이 살해당하고 암매장당할 가능성은 생각되지 않았고, 암매장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 묻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 중 가장 힘이 세고 나이가 많은 맏형인 우철원 군은 두개골에 찍힌 상흔만 무려 25군데나 발견됐는데, 이는 다른 소년들보다 범인에게 더 맹렬히 저항하다 본보기로 크게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럼에도 의혹은 여전히 남아있는데, 두개골에 찍힌 'ㄷ'자 모양의 상흔들이 흐트러짐 없이 반복적이고 규칙적이며, 이는 소년이 아직 살아있을 때 생긴 외상흔이라고 한다.
6.2. 살해 수법[편집]
5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범인이 1명이었다면 2~3명의 아이는 손으로 붙잡는다고 해도 다른 2~3명은 달아나거나 반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범행 당시의 정황을 추측하기 어렵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실험을 통해서 '어른 1명이 5명의 아이를 붙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추측했다.
게다가 이 5명은 깡통이나 작대기 등을 들고 산과 들을 매일같이 뛰어다녀서, 운동 신경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 시골 아이들이다. 살해된 아이들 중에는 달리기 육상대회에 나갈 정도로 달리기가 빠른 아이도 있었으며 태권도를 익힌 아이들도 있었다.
2011년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 3대 영구 미제 사건 특집에서는, 범죄심리학자의 말을 통해 '아무리 상대가 어린아이라도 5명이나 되면 범죄자의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위축되는 면이 생긴다'는 분석과, 범인이 1명이었다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산에 오르거나, 일시적으로 한두 명이 떨어져서 놀던 차에 아이들 중 일부를 먼저 발견하였고, 순차적으로 살해하였을 가능성도 제시하였다.
가장 막내인 김종식 군의 왼팔이 골절된 것은 범인이 소년들을 뒤에서 붙잡고 오른손으로 흉기를 내려쳤다는 가정하에, 왼팔을 먼저 들어서 막은 것으로 보아 범인은 오른손잡이이며 소년들의 좌측 두개골에 나타난 상흔들만 봐도 우측에서 위아래로 강하게 내려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영규 군의 옷소매와 단추는 찢어져 있었으며, 강한 물리적 압력에 의한 것으로 매듭 역시 도망치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기 위해 묶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소년들과는 달리 박찬인 군과 조호연 군에게는 특별한 외상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소년들이 차례로 희생되고 가장 마지막에 남아서 교살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6.3. 매장 수법[편집]
그것이 알고싶다를 비롯한 다큐멘터리와 해당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는 수많은 이들이 의외로 눈여겨 보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어찌저찌 아이들을 살해했다쳐도 도대체 어느 세월에 어떻게 매장했냐는 것이다. 이후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수색작업에 탄로나지 않을 정도로 깊게, 그것도 한 두명도 아닌 다섯 명이나 매장할 만큼 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채종민을 비롯한 법의학자들은 여러 정황 증거로 보아 아이들이 희생된 직후에 매장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결국 이 부분은 이 사건이 후술할 프로파일러들의 의견처럼 '계획성과 우발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는 부분에 힘을 실어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일단 아무나 살해하고 매장할 목적으로 삽을 비롯한 도구를 들고 산에 갔으며 그 희생양은 5명의 아이들이었다는 것. 아이들을 살해하고 나서 바로 매장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를 가지려면 아무래도 미리 삽을 들고 산에 오르는 편이 유리하니까 이는 후술할 야산 불량배들의 우발적인 살해설의 신빙성을 보장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6.4. 함승훈 군이 들은 비명소리[편집]
1993년 3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분에서 이 사건을 심층적으로 다룬 바 있는데, 당시 성서국민학교에 재학 중이던 함승훈 군의 인터뷰가 눈길을 끌었다. 함 군도 사건 당일 개구리 소년들과 비슷한 시간대에 와룡산에 갔는데, "골짜기 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이후 유골이 발견된 2002년, 대학생이 된 함 씨는 다시 이 방송의 인터뷰에 응했는데, "당시 비명소리가 들렸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절대 잊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와룡산에서 5명의 아이들이 피살된 게 분명하지만, 당시 경찰은 이 주장을 거의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엔 사이코패스란 말도 대중적으로 통용되지 않던 때라, 이유 없이 5명의 어린아이를 죽인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가출, 혹은 불량배 집단에게 앵벌이 같은 노동력 갈취 목적으로 납치당했다고 추정하는 게 상식적이었다. 이 사건이 전국적인 화제로 떠오르는 바람에 제보의 허울을 쓴 온갖 장난이나 오인 신고 등이 빗발친 탓에 엉뚱한 방향으로 경찰력이 분산되기도 했으나, 그 장난 전화들도 유괴범인척 하거나 실종자 본인인척 하는 게 대부분이었지 아이들을 죽였다는 것은 입에 담지 않았을 정도다.
또한 이 당시 사건 이후 몇 개월, 몇 년이 지나도록 실종 혹은 납치로 인식되어 많은 사람들이 개구리 소년들의 귀가를 기다렸다는 점은, 당시 시대가 한 번에 다수의 어린이들을 아무 이유 없이 살인한다는 개념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는 걸 반증한다. 1명이나 2명의 어린이라면 부모나 가족 관련 원한을 동기로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지금보다 실종이나 납치가 흔했고 시신도 발견되지 않은 탓에 더더욱 그랬을 가능성이 크기도 하다.
김종식 군의 아버지 김철규 씨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함 군의 인터뷰를 계속 되뇌며 아들 걱정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위의 함 군의 인터뷰는 다른 사람들의 인터뷰와 어긋나는 부분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12시쯤 우철원 군과 같은 반 친구인 김경열 군과 이태석 군이 서로 만났다는 증언이 있고, 2시쯤 김이수 아주머니가 "5명의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도 있으며, 기타 12시 이후의 목격 증언이 있기 때문. 다만 모두들 확실하게 증언을 하고 있으므로, 당시 누군가는 이들 증언을 토대로 정확한 수사를 해야 했지만 그 시기를 한참 전에 놓쳤다. 그리고 당시에는 함 군은 시각을 정확히 확인한 것이 아니라 그저 점심 먹기 전이라는 이유로 11시 반일 거라고 말한 것이니, 시각을 착각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7. 추측과 음모론[편집]
워낙 의문점이 많은 사건이라 수많은 추측과 가설, 음모론들이 나왔다.
7.1. 사격장 오발설[편집]
한때 인터넷에서 많이 돌아다니던 설. 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곳에서 400m 떨어진 곳에는 50사단 사격장이 있었으며, 2002년 대구시의 한 구두닦이방에서 30대로 보이는 한 손님이 "군 복무 중 갑자기 튀어나온 소년 5명을 오발하여 1명이 즉사, 1명이 부상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5명 전부 다른 곳으로 끌고 가 죽이고 은폐했다."는 말을 들은 구두닦이방 주인이 이를 제보한 바 있다. 해당 설을 지지하는 이들은 개구리 소년들의 유해가 당시 사격장 근처에 묻혀있었다는 점과 시신이 매듭 묶기 전문가에 의해 매듭 묶기가 되어 있었다는 점, 상식적으로 범인 1명이 아이 5명을 동시에 제압하기 힘들다는 점을 들어 이 설에 비중을 둔다. 실종 소년들의 부모들도 군부대 관련 사고에 가장 가능성을 두고 있다. MC스나이퍼의 곡 중에도 이 부분을 언급하는 가사가 있기 때문에 한 때 대단히 유명해졌으며 아직도 이 설을 기정사실로 믿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는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바로 논파할 수 있는 택도 없는 가설이다. 첫째, 50사단에서는 "소년들이 실종된 당일은 임시공휴일이었기 때문에 사격 일정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당시 주임원사가 진술한 바 있다. 폐쇄적인 군 특성상 병사들 입단속을 철저히 시켜서 사건을 묻어버릴 가능성도 있지만, 애초에 군대라는 조직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사 풀린 조직까지는 아니고 나름대로의 절차는 존재하기에[15] 흔히 말하는 '휴일을 빌미로 오발 사건을 덮는다'는 오발설 지지자들의 흔한 레토릭은 현실적으로 말해 어불성설이다.
둘째, 총 소리라는 것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사격 전 필히 인근 주민이나 기타 부서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방송을 하므로 함승훈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명소리가 묻혔으면 묻혔지 총소리를 못 들을 수가 없다. 장난감 BB탄 총을 퓩퓩 쏘는 소리나 영화 등의 창작물에서 총을 쏠 때 나오는 퉁퉁 정도의 소리와는 달리 실제 소총의 실탄 격발음은 엄청나게 크고 화약 냄새도 굉장히 진하다. 실제로 들어보면 알겠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탕탕 소리가 절대 아니고 귀가 찢어지는 듯한 큰 폭발음이 들린다. 괜히 군에서 사격 전 귀마개를 필히 착용하게 하겠는가. 귀마개를 껴도 총성을 가까이서 들으면 게임이나 드라마에서나 들을 법한 삐- 하는 이명이 들린다. 육군훈련소나 공군기본군사훈련단에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격이 있는 날이면 저 멀리 있는 사격장으로부터 훈련소 내 일과 공간까지도 큰 총소리가 울린다.
셋째, 위의 두 상황을 차치하더라도 아이들이 사격장에 유입된 정황에 대한 근거가 없다. 군 부대는 원칙적으로 아무나 들여보낼 수 있는 곳이 아니라[16] 민간인은 면회, 방송 촬영 등의 적법한 사유가 아니면 멋대로 영내에 들어올 수 없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아이들이 정문을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은 전무하며[17] 그렇게 들어왔다고 가정해도 사격장까지 흘러들어가는 길이 또 난관이다. 기본적으로 사격장은 총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훈련시 조교들이 항시 대기를 하기 때문에 총을 쏘는 군인이라도 자기 순번이 아니면 함부로 사격장에 들어갈 수 없다. 결국 오발설대로라면 어찌저찌 영내에 들어온 다섯 아이들이 화지대까지 뛰쳐들어가 조교의 만류를 무릅쓰고 한창 시끄럽게 총을 쏘고 있었을 사격장까지 난입해 사망했다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그림이 된다. 이쯤되면 외려 군 부대가 이를 은폐할 게 아니라 해당 부대 헌병중대 내리갈굼과 함께 사건을 공론화해도 이상할 게 없을 지경이다.[18]
정문이 아닌 외벽을 통해 들어왔다는 시나리오는 더욱 말이 안된다. 군 부대 외벽은 단단한 콘크리트 벽에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구조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그 벽을 넘어들어온 다는 건 말이 안된다. 애초에 외벽이 그렇게 허술했다면 그 부대는 당장 당나라 군대 소리들어도 할 말 없을 것이고 탈영병이 속출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 모든 가능성을 뛰어넘고 정말로 사격 도중 한 아이가 난입해 즉사했다고 치자. 오발설 지지자들은 이 과정에서 사태를 묻기 위해 나머지도 모두 살해한 뒤 매장했고 공범이 된 모두가 당시 군 부대의 권위에 위압되어 이 사건에 대해 함구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나, 이는 그야말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오히려 당시의 강했던 권위를 내세워 사격 인원 중 한 명에게만 독박을 씌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방향이 훨씬 합리적이다. 없는 죄도 만들어서 애꿎은 사람 죄인 만드는 게 가능한 시대였으니 괜히 사건 묻겠답시고 나머지 애들 모조리 죽여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 보다 안전하다.
마지막으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흔이 총격으로 인한 관통상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지만, 이 역시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이 어린아이의 급소에 총을 맞으면 흔히 생각하는 성인처럼 관통상이 나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아주 박살이 난다. 그것도 소구경 권총탄 따위가 아니라 군용탄인 5.56×45mm NATO탄에 맞았다고 가정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격장 오발 사망설은 신뢰성이 낮다.
7.2. 피해자 부친 범인설[편집]
1996년 1월에는 "실종된 김종식의 아버지인 김 씨가 아이들을 모두 토막살해한 후 그 집에 암매장했다"는 한국과학기술원 소속의 자칭 범죄 심리학자인 김가원의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집안 곳곳을 파내는 촌극을 빚기도 했는데, 결과는 참혹했다. 김 씨의 집에서는 아이들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기가 막힌 일에 당사자인 김 씨가 ''사람을 두 번 죽여도 분수가 있지..."하고 분노하자, 김가원은 "증거가 안나왔는데 더 할 말이 없죠..."라며 기자들의 추궁을 피하면서 자리를 떴다.
이후 그는 카이스트에서 해고되었고 심리학회에서도 제명되었지만, 그 뒤로도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모 웹사이트에 카페를 개설해서 여론을 모으는 한편, 2002년 유골이 발견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여전히 자기 주장이 맞다고 고집하며 2005년 11월 15일에 《아이들은 산에 가지 않았다》도 썼다. 결과는…
2011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오만했은 것은 인정하고 사과했으나, 그 외에 다른 가설들은 신빙성이 있다고 여전히 주장하는 중이다. (해당 기사, KBS 보도자료, MBC 보도자료)
인터넷에 떠도는 진범설도 이 김 씨 범인설과 2008년쯤에 어느 재미 교포가 주장한 김 씨 아내 범인설을 조합한 도시전설이다.
7.3. 야산 불량배 살인설[편집]
와룡산이 당시 우범지대였다는 설도 있다. 이하 전문.
난 대구시 서구에 위치한 서도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중학교는 당시 50사단(개구리 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곳)과 그리 멀지 않은 죽전중학교를 졸업했다. 물론 내가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다닐 때와는 약간의 세월 차는 있다. — 난 30대 초반으로써 1984년 중학교에 입학했다.[19] — 하지만, 나도 중학교 때까지 와룡산 사격장으로 탄피와 더불어 유탄을 주우러 다닌 경험이 있다. 군부대 관계자들은 부인하겠지만, 당시 근처(서구 평리동 일대까지)의 초, 중학생들 중 탄피와 유탄을 주우러 다녀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다 알 것이다. 예비군 사격훈련장까지도 들어갈 수가 있었다. 거기서 탄피를 주워 오기도 했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에 장담한다. 당시 꽤 먼 거리에 총 쏘는 곳이 있고, 총알이 박히는 쪽에는 모래주머니와 더불어 흙으로 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참고로 나는 생계곤란으로 방위병 훈련소집 면제되었다. 태어나서 아직까지 실제 총은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그야말로 당시의 기억대로이다.) 모아서 팔기도 하고, 목걸이나 기타 장식품을 만들기도 했으며, 자랑삼아 필통에 넣어 다니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때에는 이곡동(당시 50사단 근처)에 친구네 집이 있어서 자주 놀러가서 산새들과 토끼 등을 잡겠다고 와룡산에 많이 올랐었다. 지금 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곳. 민가에서 많이 떨어지지 않았던 곳으로 기억한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민가의 불빛이 보였고, 오솔길도 아래쪽으로 나 있던 곳으로 기억한다. 나도 그 근처까지, 아니, 더 위쪽으로도 자주 놀러 가봤고, 해가 지면 내려오곤 했었다. 내 기억과 경험으로 비춰봤을 때 소년들이 당시 날이 추워서 저체온증에 시달릴 정도로 추웠다면, 민가의 불빛을 보고 내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근처에 살지 않는 나도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와룡산에 갔을 때, 해가 지면 민가의 불빛을 보고 내려오곤 했었는데, 하물며 인근에 살면서 와룡산에 자주 오르락거렸던 소년들이 내려오지 못하고 사고를 당했다는 건 상식적으로도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난 그 소년들이 다른 곳에서 피살되어서 옮겨졌다기보다는, 그곳에서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물론 내 경험에 비추어봐서 추론해 본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도 어릴 때 와룡산에 자주 오르곤 했다. 그러나 늘 재미나는 산행(놀이)만은 아니었다. 가끔은 정말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와룡산은 그리 높지 않은 야산 형태이면서 깊숙이 들어가면 어느 정도 숲이 형성되기 때문에, 불량한 이들이 꽤 많이 있었다. 어릴 적 당시에 술에 취한 고등학생이나, 20대 초반 정도의 형들이 싸우는 것도 자주 목격을 했었고, 심지어는 은밀한 행각도 많이 보아왔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끔씩은 그들의 노리갯감이 되곤 했었다. 술에 취한 채 담배를 물고 나타나서는 우리가 주워 놓은 탄피와 탄두를 모조리 뺏고, 때리기도 했으며, 엎드려 뻗쳐 등 심한 기합을 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떤 때에는 복싱을 시킨다며 우리 일행을 싸움을 붙이기도 했고, 나무에 묶어놓고 괴롭힘을 당한 적도 있었다. 난 그런 이들에 의한 살인이라 여겨진다. 물론 처음에는 죽일 의도가 없었겠지만, 어찌어찌하다보니 죽이게 되었고, 서둘러 암매장을 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아니면 묶어놓고, 또는 무릎을 꿇린 채 하체 부분을 흙으로 덮어놓고(실제로 어릴 때 이렇게 당해서 거의 초죽음이 된 적이 있었다), 괴롭히다가 가해자들이 그냥 내려가 버리는 바람에 사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절대 자연사란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5명이 전부 다쳐서 움직일 수 없었다면 또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바로 아래 희미하게 민가의 불빛이 보일 것이고, 또한 근처에서 거주하던 아이들로서는 그렇게 모여서 자연사할(저체온증으로) 이유가 없다고 본다. 와룡산 일대는 소위 우범지대였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당시 와룡산에서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기억이 생생하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허벅지에는 그때 와룡산에서 그들이 장난 삼아 괴롭히며 도루코칼(하얀색, 연필 깎는 칼)로 찌른 흉터가(채 1cm도 안 되는 길이지만) 남아 있다. 아마도 어릴 때 와룡산을 드나들어봤던 이들이라면, 현재의 경찰 발표나 수사 상황에 대해 어이없어하고 답답해하며 한숨 짓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부디 조금 수고가 되더라도 정확한 사인 규명과 더불어 수사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처
지금은 동네에 인접한 야산들 상당수가 공원화되어 새벽 및 초저녁에도 운동하는 사람들이 수시로 다니고 있고, 조명등 및 CCTV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범죄가 덜하고 범죄가 일어나도 쉽게 잡을 수 있는 반면, 야산들이 방치되고 CCTV가 거의 설치되지 않았던 1990년 당시에는 비단 와룡산 뿐만 아니라 어느 동네건 인근 야산은 우범 지역이었다. 때문에 당시 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은 학교로부터 "근처 야산에는 밤은 물론 낮에도 가지 말라"는 주의를 받곤 했다. 1980~1990년대에 소위 노는 아이들이 주로 술을 마시는 곳이 동네 야산이었다. 당시에는 술 심부름 등 미성년자에게 술을 파는 것이 전혀 까다롭지 않았고, 애초에 단속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술집은 완전한 성인들만의 공간이어서 요즘 말하는 '뚫리는', '민짜술집'처럼 미성년자들이 술집에서 대놓고 술을 먹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당시에는 전국이 호황기여서 지금처럼 장사가 안 돼서 아이들에게까지 술을 팔아야 하는 곳도 없었다. 사람들의 의식도 애한테 술을 판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고. 이처럼 술은 구하기 쉽지만 마실 곳은 없는 상황에서, 가장 좋은 곳은 바로 동네 야산이었던 것이다.
'땅에 반쯤 묻히거나 서로 싸움 붙인 걸로 일어날 사건이 아닌데?' 하고 의아해할 수도 있겠지만, 위 글의 요지는 글쓴이의 구체적 경험담이 아니라 불량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됐듯이 성인 1명이서 어린애 5명은 힘들다는 관점에서, 다수에 의해 행해진 범죄일 가능성에 초점을 둔 추측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살해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각은 대낮이었으며 전술한 '5명의 아이들을 매장한 수법'을 고려하면 이 역시 개연성이 낮다. 불량배들이 일인당 한개씩 삽을 준비한 채로 산에 매일매일 올라간 게 아닌 이상, 사건이 난 직후부터 구덩이를 파더라도 저녁까지 못 팔 가능성이 높다.
7.4. 교사 범인설[편집]
2021년에는 교사가 범인일 거라는 심증이 강하다는 한 유튜브 댓글이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그 근거로 학교 교사라면 그곳 지리에 밝을 것이고 90년대의 교사들의 강했던 교권을 생각해 보면 흉기나 협박 없이 말로도 5명 정도면 통제할 수 있을 것이며[20], 교사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른 학교로 근무지를 옮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임을 지목했다. 또한 이 가설에 의하면, 당시 관점으로 '어떻게 선생이 자기 제자를 죽이냐'는 고정관념도 교사를 용의자로 제대로 수사하지 못하게 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2011년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아이들을 심하게 폭행하다 해고된 한 교사[21][22]가 용의 선상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해당 방송에서도 짤막하게 언급만 하고 넘어간 것으로 보아 수사 기관이나 방송 관계자들도 이 인물에 대해선 크게 주안점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2000~2010년대와는 달리 수많은 용의자 헛지목 사건으로 인한 명예훼손의 위험성을 경험한 네티즌들 역시 특정성이 성립될 수 있는 인물을 함부로 범인으로 지목하는 현상에 대해선 우려를 표하고 있다. 사건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견지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환영하지만 뚜렷한 증거 없이 심증만 있는 상황에서 범인을 지목하는 것은 지양하자는 것이 중론이다.
7.5. 기타[편집]
워낙 공전절후의 영향력을 지닌 사건인데다 남아있는 물증 또한 극히 드문 상태이다보니 전술한 가설 외에 이런저런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따라서 후술할 가설들은 당시 정황을 바탕으로 유추한 추측임을 염두에 두자.
일부 소년들의 옷은 일반인이 거의 하지 못하는 정교한 매듭 방식으로 묶여 있었다. 이 때문에 범인, 공범이 있을 경우 최소한 일부는 평소 포장 작업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이며, 임시 공휴일에 회사를 쉬면서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모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와룡산에 사는 도사견 견주가 진범이 아닐까" 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는데, 해당 글의 후속 내용이 전혀 올라오지 않고 시기상으로도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많아 금세 잊히기도 했다. 관련 게시물.
남파간첩설도 있다. 요즘이야 특정 정치 극단주의 세력에서 툭하면 북한 배후설을 주장하는 통에 이런 주장이 별로 존중받지 못하는 형국이 됐지만 전술했듯 과거 남한 고등학생이 납북된 사례를 들어 남파간첩설이 제기된 바도 있었고 불과 5년 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있었고 마찬가지로 6년 후 남파간첩의 소행으로 유력하게 지목되는 화성 해안초소 K-2 소총 사취 사건 등, 90년대만 하더라도 이런 류의 사건사고가 잊을 만 하면 발생했었다. 즉, 시대를 감안하면 북한이 연루되어 있지 않았을까하는 의심 정도는 충분히 하고도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와룡산 근처에 안기부가 있었고 사건이 난 곳은 군부대 바로 근처라 군대의 동태를 살피러 온 남파간첩을 보낼 만한 당위성도 충분했고, (일단 범인이 남파간첩이 맞다고 가정하자면) 어쩌다 소년들에게 정체가 노출되어 모두 죽여 처리했다는 것이 가설의 핵심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혼자서 튼튼한 국민학생 다섯을 제압한 무력이나 살인에 망설임이 없고 매듭처리가 능숙한 것도 설명이 되고, 근처에 바로 깊이 묻지 않고 대략 묻은 것도 설명이 된다. 어차피 곧 월북할 테니까. 다만 이 설도 한계가 명확한 것이, 와룡산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드보크 등의 흔적이 발견된 바 없었고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이들의 유골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국내에서 유괴되었음을 주안점을 두고 수사를 진행한 바를 보아, 당시 수사기관이나 정부 수반도 남파간첩설에는 그다지 무게를 두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021년 4월 12일, 살해 용의자를 25년 넘게 수차례 제보했으나 번번이 묵살되었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기사
8.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분석[편집]
800회 특집을 맞아, 국내 3대 미제 사건의 2번째 편으로 《개구리 소년 편》을 방송했다.[23] 《그것이 알고 싶다》는 이미 93년과 2002년에 이 사건을 다룬 바가 있었다.
방송은 아이들의 유골에 드러난 타살 흔적을 바탕으로 살해 도구를 분석하는 데 주력했다. 여러 공구들을 토대로 실험해 본 결과, 가장 유력한 살해 도구로 추정되는 것은 용접 후 생기는 찌꺼기를 끊거나 때려서 제거하는 데 쓰이는 용접 망치로, 흔히 깡깡 망치라고 불리는 것이다.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도구지만, 공사 현장이나 공장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공구라고 한다.[24][25]
이 소년들이 살해된 시점에 대해 채종민 법의학자는 "초등학생 때는 이미 영구치가 자란 성인들과는 달리 6개월 단위로 치아 발육이 달라지는데, 이 점을 토대로 미루어볼 때, 개구리 소년은 1991년 3월 26일에 실종된 후 아무리 길게 잡아봤자 6개월 이내에 살해되었을 것"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두개골 하나는 돌에 눌려 납작하게 변형이 되어 있었는데, 당시 부검에 참여했던 채종민 법의학자는 "뼈도 70~80%는 물로 이루어져 있고, 물이 있어야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이는 아직 뼈가 건조되기 전에 돌에 눌렸음을 뜻하는 것으로, 아이들이 살해된 직후에 매장되었을 것이란 걸 말해준다.
미국의 법의곤충학자 데이비드 포크너 또한, 조호연 군의 두개골에서 나온 구더기 껍데기를 통해 "소년들이 살해된 직후에 곧바로 매장되었다"라고 말했다. 조호연 군의 두개골에는 성체 파리가 이미 날아간 흔적이 있는데, 이는 2가지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시신이 매우 얕게 매장되어 있어서 성체 파리가 날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고, 2번째는 파리 한 세대가 발생한 후에 매장되었을 가능성을 말한다. 전자라면 시신이 살해된 직후에 곧바로 매장되었다는 걸 말하고, 후자라면 시신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매장되었다는 걸 말해준다.
그런데 알에서 구더기가 깨어나는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8~14시간이라고 하며, 파리 한 세대가 발생했다면 번데기가 많이 보여야 하는데, 조호연 군의 두개골에선 번데기의 수가 적었다. 이는 곧 파리 1마리에서 구더기들이 만들어졌고, 시신이 매우 얕게 매장되어서 성체 파리가 다 날아가버린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신에 곤충이 접근하는 것을 막을 것이 없다면, 24시간 내에 곤충이 시신에다 알을 낳는다고 한다. 근데 조호연 군의 두개골에서 구더기가 부화한 흔적이 있고, 구더기가 부화하는 데는 알을 낳고 8~14시간 이내라고 하니, 이는 곧 구더기가 부화하기 전에 매장되었다는 뜻이다.
채종민 법의학자의 소견과 데이비드 포크너 박사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결국 소년들이 살해당하고 짧게는 8시간 이내에 길게는 14시간 이내에 매장되었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야 뼈의 물기가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돌에 두개골이 눌려 두개골이 납작하게 변형이 일어날 수 있고, 또 두개골에 깠던 파리의 알이 부화해 구더기가 생길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장은 성체 파리가 날아가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얕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두 학자들의 주장으로 미루어 볼 때, 실종된 1991년 3월 26일 바로 그날에 살해당했고 같은 날 바로 매장되었다고 봐야 할 듯하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한 경찰대학 박지선 심리학과 교수는 "이 사건은 계획성과 우발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계획성을 나타내주는 증거는 일반적으로는 잘 쓰지 않는 흉기를 사용했다는 점이고, 우발성을 나타내주는 증거는 타깃을 소년들로 정한 것이란 점이다.
사실 아무리 범인이 성인이고 상대는 어린이들이라도, 1명이서 5명을 상대로 살인을 저지를 때는 성인 범죄자라도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면을 보인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1명이 한꺼번에 5명을 붙잡아두기에는 어렵다는 점을 볼 때, 범인이 한꺼번에 5명의 어린이를 모아놓고 그 자리에서 죽인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순차적으로 죽인 것이라고 분석했다. 즉, 아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약간 떨어져 있었을 때 먼저 1~2명을 죽이는 모습을 보여 공포심을 안겨주었고, 겁에 질려 있는 아이들을 무차별로 구타해[26] 제압한 다음 죽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범인의 수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다수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1명이라고 분석했다. 왜냐하면 범인이 복수일 경우엔 피해자 중 1~2명은 순종적인 경향을 보이는데, 그런 점이 보이질 않는다는 데서 1명이라고 분석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1명의 범인이 와룡산에 올라온 아이들을 보고 처음엔 5명이나 되는 줄 모르고 먼저 앞에 있던 1~2명의 아이를 죽였는데, 알고 봤더니 일행이 몇 명 더 있었고, 입막음을 위해 나머지 아이들도 뒤쫓아가 모조리 살해했다는 분석이었다.
미국의 유명한 범죄심리학자 에릭 힉키는 "처음엔 두개골에 찍힌 상처가 여러 가지 형태라는 점을 미루어 범인이 복수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다시 한번 두개골의 형태를 살펴본 결과 범인은 역시 1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가 범인을 1명으로 결론내린 이유는 유골에 난 잔혹성 때문이었다. 극도의 잔혹성을 드러내는 범죄자 2명 이상이 짝을 이루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27] 혹 5명의 소년을 제압하는데 조력자가 있었을지는 몰라도, 직접적으로 흉기를 휘두른 인물은 2명이 아니라 1명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정신이상자의 소행이라면 증거가 꽤 많이 남았을 것이고, 시체를 매장하는 일도 거의 없다고 한다. 에릭 힉키 박사는 "범인은 생각보다 시체가 늦게 발견되어서 놀랐을 것"이라고 하며,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고,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걸 알고 있어도 신경쓰지 않는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또 "아이들의 옷처리나 묶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살해 경험이 이 사건 이전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미리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매장을 얕게 했던 것도,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함에 불과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힉키 교수는 이 사건은 "사이코패스가 저지른 사건이며, 범인의 수는 1명이고, 다시 살인을 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매우 위험한 인물로, 아마 (이 사건으로) 체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28]"고 주장했다.
박지선 교수 역시 "범인과 개구리 소년 5명은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돈을 노린 범죄라고 하기엔 진짜 범인은 단 한 번도 돈을 요구한 바 없었고, 원한에 의한 소행이라기엔 한 자리에서 5명이나 되는 소년들을 모조리 죽인 게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년들의 시신이 매장된 곳이 새방골에서도 가장 골이 깊고 수풀이 우거진 곳이라는 점과, 가시덤불이 많고 인근에 군부대 사격장이 있어서 사람들의 출입이 뜸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마을에 사는 소년들이 탄피를 모으러 자주 오르락거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점으로 볼 때, 현지 사정과 지리에 매우 밝은 인물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소년들을 살해한 이유는 단지 살인 그 자체를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결국 이 방송에서 개구리 소년 사건의 범인과 흉기에 대해 내린 분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범인의 수는 1명으로 와룡산 일대의 지리와 사정에 매우 밝은 사람이었고,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꺼번에 5명의 아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죽인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순차적으로 5명의 아이들을 살해했고, 그때 사용한 흉기는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서 자주 쓰이는 용접 망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났던 1991년 당시에는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수사에 대한 초점을 잘못 맞추었고, 그래서 해결할 방법이 없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실제 한국에서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이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후반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등의 등장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초로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단순히 살인을 즐기려고 무고한 어린이 5명을 죽인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못할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아이들을 납치해 가서[29] 앵벌이를 시키는 등의 사건이 많았다. 때문에 개구리 소년 찾기 캠페인이 벌어질 때도 "각종 역, 터미널, 지하철 승강장 등에서 앵벌이하는 아이들을 유심히 봐달라"고 하던 수준이였다.
방송 말미에 진행자 김상중은 "공소시효가 끝났다고 하더라도 절대 이 사건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범인을 계속 추적해야 하는 이유는, 이 자가 현재도 우리들의 이웃인 척하고 살면서 또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라고 시청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9. 대중매체에서[편집]
1991년 11월에 이기창 작가가 이 사건을 다룬 어린이 추리소설 《개구리 잡으러 간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를 낸 바 있다.
1992년 11월 28일에 조금환 감독[30]이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해 개봉하였다. 당시 서울에서만 300,227명의 관객을 기록했으며 아역배우로 활동했던 변성현, 장덕수, 김민정, 이재은이 출연하였다.
2003년에 발매된 MC 스나이퍼 2집 수록곡 《개구리 소년 (개구리 소년의 유가족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은 이 사건을 토대로 다뤘다.
2005년에 김가원 교수가 소설 《아이들은 산에 가지 않았다.》를 냈는데, 2011년에 이규만 감독이 이걸 바탕으로 하여 《아이들...》로 영화화했다.
10. 그 외[편집]
2006년 공소시효가 만료됐음에도 경찰 측은 공식적으로 수사를 끝내지 않은 채 2015년 내사 종결 처리했으나, 2019년 9월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잡히자 민갑룡 경찰청장이 이 사건도 재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결국은 범인을 잡아낼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이 사건은 범인을 잡아낼만한 뚜렷한 물증을 전혀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 진척은 기대하기 어렵다. 다른 3대 미제 사건인 이형호 유괴 사건마저도 정황증거로 용의자 추론이라도 할 수 있지만 본 사건은 용의자가 누군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아이들의 유골 외에는 증거도 없고, 그것으로 조사할 수 있는 것도 그저 아이들이 어떻게 죽었을지, 용의자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지 정도만 짐작할 수 있는 수준이라 제대로 추론도 하기 힘든 상황이다.
간간이 방송에서 유족들의 근황을 취재하기도 하는데, 이를 두고 '왜 아픈 기억을 자꾸 들춰서 유족들을 괴롭히냐'는 반응도 있으나, 정작 가족들은 "미제 사건이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대중들에게 재차 알리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아픈 기억보다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아이들과 사건이 잊혀지는게 더욱 괴롭다"고 한다.
유골이 발견 된 곳 인근(200m)에서 움막이 발견됐다.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움막의 형태가 아닌 지하 토굴 형태의 움막으로 인근 주민들의 증언으로는 2~3년간 박모씨가 묵었던 곳이라고 한다. 유골 발견 직후 사건과 관련성이 의심 되었으나 이 후 조사결과 움막에 깔린 장판이 1999년에 생산 된 것을 비롯해 대부분의 물품이 유골 발견 2~3년 전 것들임이 밝혀 지면서 사건과의 직접적 연관성은 적을 것으로 판단되었다고 한다.
실종 이래 성서초 측은 유해 발견 전까지 실종자들을 쭉 정원 외로 학적에 남겨둔 채 관리해 왔으나, 발견 후 2003년 2월에 명예졸업장이 추서됐다. 소년들의 유해는 2004년 경북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후 두개골만 경북대에 보관됐고, 나머지는 대구시립화장장에서 화장돼 성주대교에서 뿌렸다.
비슷한 사건이 1979년 울산에서 일어난 적이 있다. 어린이 3명이 가재를 잡는다고 산으로 간 뒤 실종된 사건. 그러나 단순히 길을 잃고 조난을 당한 것이었고, 산나물을 캐던 할머니들에 의해 28일만에 발견되어 생환했다. 발견 당시 극심한 영양실조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상태였으나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고, 성인이 된 후에도 3명이 다시 모여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
50사단이 이전한 와룡산에는 쓰레기 매립장이 생겼고, 고등학교가 이전해 오며 사건 당시와는 풍경이 많이 달라졌다.
2020년 1월, 싱가포르 국영매체 CNA에서 한국의 '개구리 소년 실종'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실종 소년들의 부모님과 관계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매우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2021년 3월 26일, 대구시는 달서구 와룡산 선원공원에 '개구리소년 추모 및 어린이안전 기원비'를 제막했다.(기사)
2021년 7월 20일 현직 경찰인 우철원 군의 외삼촌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백신 교차접종[31] 후 자택에서 쓰러졌으나 숨졌다. 고인이 경찰의 길을 택한 계기도 이 사건 때문이었다고 한다.
11. 참고 자료[편집]
시사저널 1991년 9월 19일 기사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2014년 3월 25일 방송분
CBS <김현정의 뉴스쇼> - '탐정 손수호' 2017년 9월 28일 방송분
일요시사 <긴급기획> 개구리소년 30주기: 1회, 2회, 3회, 4회, 5회
12. 둘러보기[편집]
문서가 있는 대한민국의 살인 사건 목록
[1] 통계청에서 제공하는 소비자 물가지수를 이용한 화폐가치 환산에 따르면 1991년 당시의 4,200만 원은 2021년 6월 기준으로 101,681,999원, 즉 현재 가치로 1억 원이 넘는 거금이다.
[2] 이 날은 기초자치단체 의원을 뽑았다. 광역자치단체 의원은 3달이 지난 6월 20일에 선출.
[3] 아이들 유골 중 제일 늦게 발견되었다고 한다.
[4] 후에 이 청년은 인터뷰에서 "나 때문에 애들이 죽었다"고 후회했다.
[5] 크게 보면, 김태룡은 이들 중 유일하게 화를 면한 생존자인 셈이다.
[6] 성인이 된 함 씨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소리였다."고 밝혔다.
[7] 현 유니베라
[8] 1962년 설립. 혈전 용해 치료제 '용심'과 어린이 영양제 '아토실'로 유명했다. 1997년 삼성정밀화학에 인수.
[9] 변종으로 아이들은 사실은 인류가 아니라 어느 별의 외계인(…)이라서 외계인이 불러간 것이라는 개소리도 있다.
[10] 사건 이후 다른 부모들과 함께 아이들을 찾으러 다니던 모습과, 1993년 당시 그것이 알고 싶다 인터뷰에 응했던 모습을 보면 본래 그는 매우 건장한 체격이었다. 젊었을 때 유도를 해서 매우 건강했다고. 그런 그가 간암에 걸려 죽을 정도로 폭음을 했으니, 아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게 얼마나 큰 고통이였을지 알 수 있다.
[11] 하필 유골 발견 전날에 들어온 제보라 제대로 엮였다.
[12] 몽타주의 얼굴이 굉장히 섬뜩하다. 사진도 흐릿해서 더 무서울 수 있다. 물론 진짜 범인은 아니지만 개구리 소년 사건 관련 글을 찾다 보면 이 얼굴이 상단에 같이 보이기 때문에 무서울 수가 있다. 넷상에서는 왜인지 개구리 소년 살인 사건의 범인 몽타주로 알려져 돌아다니는데, 범인의 몽타주가 절대 아니다. 연필로 그린 것이 2개가 있는데 그중 한 개는 사진도 많이 흐리고 오래돼서 변질이 된 상태여서 굉장히 무섭다. 심약자는 보지 않는게 좋다. 움짤도 있는데 움직일 때 불쾌한 골짜기 효과가 더해져서 역시 기분나쁘고 섬뜩하다.
[13] 당시 달서경찰서장이었던 김용판은 2012년 서울경찰청장에 임명됐다. 2005년에 성서경찰서가 신설되어 현재 사건 현장은 성서경찰서 관할이다. 달서경찰서는 월배권 관할.
[14] 당시에는 살인 사건이라고 해야 원한 혹은 치정과 연관된 사건이 대다수였던 데다가, 아이들을 범죄에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 유괴였기 때문. 위에서 상술한 바대로 부모들의 성화를 못 견뎌 가출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15] 사격 일정이 생기면 사격을 위한 환경 정비는 화기 담당 부서 구성원들의 몫이며 담당 간부에게나 병사에게나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사격일정이 없는 날도 총기 관리 등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들도 쉬는 날엔 쉬고 싶지 않겠나? 더욱이 사격 일정은 상부에 필히 보고해야 하며 다른 물건도 아니고 총을 다루는 부서이기 때문에 휴일이라는 전제를 쌩까고 무대뽀로 사격을 강행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총 한 번 쏘는데 들어가는 관계자들이 이렇게 많은데 과연 이 많은 이들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살인 사건에 함구를 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16] 간부를 사칭해 영내에 침입한 사건이 있기는 했으나 이건 애당초 해당 범인이 해당 부대 관계자인 척 연기를 한 것이고 일자 면식도 없다고 판단된 이를 들여보낸 것이 아니다.
[17] 영내 장교나 부사관의 자녀를 사칭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18] 다만 당시에 아이들이 와룡산에 탄피를 주우러 다녔다는 증언들은 매우 많고, 특히 아래 단락에서의 증언처럼 예비군 사격장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탄피는 탄자와 달리 사격장에서 사로 근처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탄피를 주울 수 있다는 건 사로 근처까지 접근이 가능했다는 의미이다.) 2000년대 이후 전방의 소위 메이커 사단 복무자들의 경험과는 달리, 많은 부대들이 사격장을 부대 주둔지 내부가 아닌 부대 외부 시설로 두고 있으며, 이런 시설들은 고작 해야 녹슨 철조망 정도로 둘러쳐지고 상주하는 경계병력도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후방 향토 부대일수록 이런 경향은 더 심하며,(그리고 50사단은 향토방위사단이다.) 80년대말~90년대초에는 지금보다 더욱 관리가 부실했다.
[19] 현재 49~50세.
[20] 실제로 이보다 앞선 시점, 교사가 자신의 제자들과 결탁해 또다른 제자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으며 이 사건의 범인 역시 당시의 강력한 교권을 이용해 해당 사건은 물론, 이전에 저지른 수많은 여학생들을 강간한 사건 역시 묻어버린 바 있었다.
[21] 2010년대 후반들어 미투 운동이 활발해지자 그 여파로 각종 커뮤니티에서 체벌이 횡행했을 당시 학생이었던 이들의 경험담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지역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지방 학교의 경우 일개 소도시도 아닌 광역시에서도 체벌과 단체기합은 2000년대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학생인권조례가 발표된 이후인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더구나 사건이 발생한 곳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환경으로 유명한 대경권이었으며 대경권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의 증언을 보면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체벌이 잔존했다는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그런 대경권에서, 심지어 체벌과 아동학대의 수위가 2000~2010년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던 90년대 학교에서 지나친 체벌로 학교에서 해고까지 당할 정도의 선생이라니, 상상이 가는가?
[22] 실제로 이때 당시의 학교에선 엄한 분위기와 체벌이 일상적이고 부패함 역시 잘못되었다는 인식률이 낮아 지금보다 더 심했다. 아이들한테 욕설과 구타는 기본이고 선을 넘은 체벌과 얼차려를 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아이들을 너무 폭행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는 것은 교육계의 높으신 분들이 보아도 못 봐 줄 정도로 심각했다는 얘기다.
[23] 즉, 이 방송은 801회 때 방영된 것이다.
[24] 전기 용접후에 용접 부위 위에 산소와 산화된 철산화물 같은 커버가 생겨있는데 보통 현장에서 이 망치로 때려서 떼어낸다.
[25] 하지만 용접망치의 뾰족한 부분으로 때리면 정사각형이 생기지만 실제 상처는 직사각형이다.
[26] 조호연 군의 두개골과 박찬인 군의 두개골에서 구타를 당했다는 소견이 나왔고, 김종식 군의 왼팔 뼈가 골절된 것으로 보아, 왼팔을 들어 범인의 공격을 방어하려다 발생한 흔적(방어흔)이라는 소견이 나왔다. 또 김영규 군의 상의가 심하게 찢어진 것으로 보아, 범인에게 우악스럽게 잡혀 찢어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27] 물론 찰스 잉 & 레나드 레이크의 경우처럼 잔혹한 살인마 2명이 의기투합해 짝패가 된 경우도 있었고, 맨슨 패밀리처럼 순종적인 조력자가 있는 경우는 좀 더 있다.
[28] 물론 미제 사건이기 때문에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다. 단 연쇄살인사건의 범인들은 다른 사건으로도 잡히지 않았다지만 이미 전과자이거나, 간혹 다른 사건으로 붙잡혀 이미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경우도 역시 많다. 일례로 안양 환전소 여직원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연쇄살인의 주범인 최세용이라던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에 대해서, 연쇄살인범 유영철은 "나의 경험에 비추어, 이 사건의 범인은 아마 죽었거나, 오래전에 다른 사건으로 이미 교도소에 수감되어 복역 중일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고, 2019년 9월 18일 교도소 내에서 복역중인 것으로 밝혀지며 사실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힉키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적어도 어느 쪽이건 범인은 이 사건으로 검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29] 물론 전문적인 납치범이 아니라 불량배 등이 아이들을 집에서 먼 곳에 데려가거나 자신들이 지속적으로 감시하여 억류하는 수준의 유괴. 가출한 아이들이나 가정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주된 피해자였다.
[30]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1~2탄을 만든 사람으로, 2014년에 영상물등급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31] 1차 아스트라제네카, 2차 화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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